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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o young to villain, Too young to love
콘 엘
X
브루스 웨인
by. Ru
주제: 빌런화
※코너 켄트(콘-엘/슈퍼보이)x브루스 웨인(배트맨) 커플링입니다.
※애니메이션 시리즈 영 저스티스 기반이지만 설정과 다른 부분도 있습니다.
※시간대는 대략 시즌1 이후~시즌 2 사이 공백기입니다.
1.
[MOUNT JUSTICE
August 1, 13:07 EDT]
마운트 저스티스. 정의의 산. 해변을 끼고 있는 이 장엄한 산은 오랜 기간동안 영웅들과 함께해 온 곳이다. 산이라 불리고 있고 외관 또한 영락없는 산이지만, 초인들의 손에 내부가 말끔히 파여 있어 사실상 동굴에 가까운 본거지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저스티스 리그의 히어로들이 이 곳에서 영웅적인 일을 했으나 지금은 이야기가 조금 달라졌다. 오해는 말라. 여전히 이 곳은 히어로들의 주둔지이며, 아주 가끔의 예외가 있긴 해도 대부분 영웅적인 일이 이루어지는 곳이니까. 비록 거주자들의 평균 연령대가 대폭 꺾였다고 한들 마운트 저스티스의 이름에 흠이 가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전보다 발전한 기술력을 탑재하고 그에 맞춰 혈기왕성한 사이드킥들, 아니. 영 저스티스 리그를 받아들임으로써 이 곳의 명예가 한층 드높아졌다고 할 수 있을...
쾅!
"거기 비켜!"
"월리, 뒤를 맡아! 주변을 감싸서 파훼해버ㄹ... 조심해!"
"칼더 물러나!"
"큭!"
"코너! 진짜 이럴래!"
"악! 쫌! 친구가 말 하는데 벽 던지는 거 아니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2.
[SANTA PRISCA
July 4, 01:08 EDT]
빽빽한 풀숲 사이로 두 인영이 민첩하게 내달렸다. 큼지막한 잎사귀들과 덩굴로 뒤덮인 나무들 사이로 간간히 좁은 길이 나있었지만 로빈과 아쿠아래드는 동물들이나 간간히 파고들 법한 험한 길만을 골라 달렸다. 등지고 온 방향에서 잇달아 폭발음이 터졌다. 그들이 우회한 길을 따라 소란한 발자국이 떼를 지어 몰려간다. 그 모든 광경을 한 귀로 들으며 로빈은 정보를 수집했다. 걸음 하나하나가 묵직하고 얼핏 제멋대로 달리는 것 같으나 일사불란한 박자를 유지하는 걸 보아 제법 뼈가 굵은 용병들인 모양이었다. 몇몇의 등에 박격포가 매달린 것이 보였다. 작정하고 다 날려 버리려는 모양이다. 나뭇가지 사이에 착지한 로빈은 제 멘토처럼 그림자 속에 기가 막히게 스며들었다.
몇 미터 떨어진 수풀에 웅크린 칼더의 옆으로 잔상이 멈춰 섰다. 섬 전체를 훑곤 온 직후지만 숨을 고를 필요가 없는 키드 플래시는 발이 완전히 멈추기도 전에 성급하게 속삭였다.
"아직 몇 남아있어. 토네이도가 최대한 전력을 자기 쪽에 끌어갔는데, 지하 깊숙한 곳에 있는 놈들은 움직일 기미가 없나봐."
"거긴 포기할 수 없다는건가."
"거의 다 된 밥이라 이거지."
용병 무리가 지나가고 잠잠해진 후에도 칼더와 로빈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처럼 기다려야한다는 건 알지만 월리에게 이건 고문이나 다름없다. 급한 마음 그대로 발이라도 구르고 싶지만 임무 수행 중에 당치 않은 소리다. 더구나 친구를 구하러 온 임무라면, 실수가 없어야 한다. 그건 필시 딕도 칼더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몇 초 지나지 않아 통신이 왔다. 셋은 동시에 인이어로 손을 올렸다. 미스 마샨이 부재 중인 지금 텔레파시 전달은 가능한 선택지가 아니다. 그들이 있는 곳과 반대 방향에서 잠입을 시도 중인 블랙 카나리나 그린 애로우의 연락일 터였다. 아쿠아래드는 목소리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상황을 보고했다.
"여긴 다 모였습니다. 당장이라도 투입 가능해요. 지금..."
-아직이다. 내 신호를 기다려.
내내 존재감을 완벽히 지우고 있던 딕의 눈이 크게 뜨였다. 시종일관 진지하던 월리의 턱이 조금 벌어졌다. 칼더마저 멈칫한 그 순간 로빈이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끼어들었다.
"배트맨??"
-침착해라 로빈. 통신시 발언 우선권은 리더에게...
"그게 중요해요?! 나한테도 말없이 대체 언제부터...!"
-작전과 관계없는 질문은 나중에 답하마. 지금은 눈 앞의 상황에 집중하거라. 아쿠아래드.
예상치 못한 등장 탓에 당황한 칼더는 제 이름을 듣고도 반응이 느렸다. 드물게 멍한 리더의 모습을 놀리기 위해 로빈의 카랑카랑한 웃음소리와 월리의 시답잖은 능글거림이 따라붙어야 하겠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정신을 수습한 칼더가 황급히 대답했다.
"...아, 네! 듣, 고 있습니다."
-30초 후 돌입 신호를 보내겠다. 길을 미리 뚫어둘테니 곧장 슈퍼보이를 찾아 확보하도록. 적과의 싸움은 최소한으로. 진입과 목표까지의 도달, 그리고 안전을 우선시해라.
"예!"
역시 리더는 리더, 빠르게 페이스를 회복한 칼더가 믿음직스럽게 답했다. 변함없는 어조로 세부 사항을 설명하는 배트맨에 귀 기울이는 눈이 진중하게 빛났다. 그와 달리 뒤편에서 대기 중인 두 팀원은 아직 감정이 가라앉지 않은 모양이었다. 훌쩍 뛰어내려 칼더 뒤편에 자리 잡은 로빈의 눈은 심상찮을 정도로 좁아져 있었다. 딱 다문 입은 불만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그 옆에서 월리는 목소리를 싹 소거한채 입만 바삐 움직였다. 배트맨이 왔어! 작전에 참여하나 봐! 언제 합류한거야?! 지금은 어디 있는건데?!? 헐 나 배트맨이랑 처음 일해 보는건데 이게 이런 식으로 기회가 올 줄은 누가 알았겠냐. 진짜 놀랄 노자다. SP가 잡히고 지금까지 정말 놀랄 일 투성ㅇ...
-전달사항은 여기까지. 그리고 키드 플래시, 임무 중 사담 지양은 무음이라도 예외가 아니다. 배트맨 아웃.
와다다다 진동하듯 움직이던 입이 딱 다물렸다. 입술끼리 맞부딪히는 소리가 날 정도였다. 어째 알았대... 머쓱한 혼잣말은 현명하게 입 밖으로도, 입모양으로도 내지 않았다. 아쿠아래드는 단호한 눈빛을 둘과 교환했다. 돌입까지 몇 초 남지 않았다. 다 쏟아내지 못한 놀라움도 못내 사그라 들지 않는 불만도 모두 묻어두고 영웅이 되어야 할 때다. 정확히 6초 후, 건물 주변을 감싼 방호벽의 전기가 끊기는 것과 동시에 건물 외벽에 붙은 점토폭탄이 일제히 터졌다. 셋은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달려나갔다.
3.
[SANTA PRISCA
July 4, 01:36 EDT]
"...이제 적은 더 없는 거 같은데."
월리의 중얼거림에 답하듯 고개를 끄덕여보이면서도 칼더는 푸르게 빛나는 검을 놓지 않았다. 길을 뚫어놓겠다는 말 그대로 그들이 지하로 내려가는 동안 마주친 적은 손꼽을 정도였지만 그래도 적진 한 복판인 이상 긴장을 풀어선 안 된다. 벽과 분간이 안 될 정도로 굳게 닫힌 여러 문들 앞에 선 로빈은 금세 목표를 찾아냈다. 한가운데 봉해진 자물쇠는 미리 확보해둔 보안 코드 덕에 쉽게 풀렸다.
"워어..."
고글을 슬쩍 밀어올린 월리는 이마 쪽으로 입김을 훅 불었다. 곧은 적발은 미동없이 빳빳하기만 하다. 이것저것 수상쩍은 기기나 뽀글거리는 물방울이 올라오는 액체유리관으로 가득할 거라고 생각했던 내부는 의외로 살풍경했다. 빌런아지트에 으레 있는 이런 것(녹슨 파이프가 천장부터 바닥까지 뻗은 기계)나 저런 것(끊기고 늘어진 전선과 바닥에 고인 정체 모를 액체)이 군데군데 보이긴 했지만 대체로 버려진 방처럼 보였다. 컴컴한 지하 특유의 녹 냄새는 후각을 곤두세우게 만드는 화학물질 향과 합쳐져 지독하다.
유틸리티 벨트에서 탐지기를 꺼내 사방을 비춰보던 로빈은 아무말없이 아쿠아래드 앞을 가리켰다. 맞은편 벽 속에 뭔가 있어. 눈짓하고 앞서 걸어갔다. 가까이 갈 수록 전자기기의 웅웅거림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어두운 방, 더 어두운 벽에 맞물려 언뜻 빈 공간처럼 보이는 곳에 뭔가 있었다. 벽 속에 통째로 매립한 것처럼 보이는 직육면체는 족히 3m는 되어보였다.
"금고인가...? 뭐든 간에 정말 딴딴하게 만든 것처럼 보이는 걸."
"그래. 이 방에서 제일 중요한 곳인거지. 이 시설 전력의 8할이 여기로 모여있어. 아무래도..."
"비켜서거라."
흐억?! 반사적으로 튀어오른 월리가 심장께를 짓누르며 뒤를 돌아봤다. 그림자에서 솟아난 것처럼 무시무시한 배트맨이 거기 있었다. 저도 모르게 콩콩 뒷걸음질 치는 월리를 제지한 칼더는 제 심장도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거리고 있단 걸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분명 문을 닫아걸었는데도 소위 '민간인' 히어로가 어떻게 들어왔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함께 억눌렀다. 이 갑작스러운 등장에 태연한 건 오로지 로빈 하나 뿐이었다. 한동안 묻어는 두었지만 잊어버린 게 아니라는듯, 다시 불만이 고스란히 드러난 얼굴을 하면서도 배트맨 옆에 붙는 로빈을 보며 월리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넌 눈치챘어??? 황망한 물음이 담긴 시선에 딕은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당연한 걸 왜 물어? 뻔뻔한 기색도 없어 더욱 뻔뻔하게 느껴지는 얼굴을 마주한 월리가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직육면체를 살피던 배트맨의 손가락이 벽에 희미하게 패인 홈을 따라 내려갔다. 카울의 눈이 살짝 좁혀지더니 아무 것도 없어보이는 빈 벽에 빛을 비추어본다. 로빈. 낮은 음색에 딕이 성큼 다가섰고, 한동안 희미한 소음만이 이어졌다. 말을 맞출 필요도 없다는 듯 자연스러운 광경이다. 그 뒷편에서 어정쩡한 시선을 교환하던 두 사람은 나직한 목소리가 설명을 시작하자 귀를 쫑긋 세웠다.
"너희들도 짐작했겠지만 이 안에 슈퍼보이가 구금되어 있다."
"역시!!! ㅋ...SP는 괜찮은 거예요?!"
"그래. 몇 분 전 시설 책임자를 심문한 블랙 카나리의 정보에 의하면 그는 상처 없이 무사하다."
"휴..."
한 시름 덜어낸 듯 월리의 표정이 훨씬 밝아졌다. 잘 됐네, 구출하고 나서 내가 한 대 때려도 괜찮겠구만. 과장스레 내쉬는 한숨에는 그 특유의 장난기마저 돌아와 있었다. 아쿠아래드가 신중하게 질문했다.
"그럼... 우리가 걱정할 일은 없는 겁니까?"
정밀하게 사각거리는 소리가 잠깐 멎는 듯 했다. 로빈과 배트맨 사이로 시선교환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한층 심각해진 표정이 된 로빈이 제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턱을 굳게 다문 표정에 아까와는 다른 긴장감이 감돈다. 몸을 일으킨 배트맨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아까와 다를 바 없는 어조지만 말의 속도가 조금 더 차분해진 것도 같았다.
"신체적으로는 그렇다. 이 자들은 슈퍼보이를 해치거나 그의 신체를 빼돌리려던 게 아니야. 목적은 그의 정신이었다."
어-오. 월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 바닥에 잔뼈가 굵은 히어로라면 저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리가 없다.
"방금 로빈과 내가 구금튜브의 보안 장치를 해제했다. 슈퍼보이를 구출하기 전에, 유의해야할 것은 이 안에 든 슈퍼보이의 태도가 호의적일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는 점이다. 너희 모두가 그와의 첫 만남을 기억하겠지."
월리가 앓는 소리를 냈다.
"으... 설마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한단 말은 아니겠죠..."
"슈퍼보이의 정신을 정확히 어떻게 한 거죠? 설마 캐드모스의 병기처럼 사용할 수 있게 세뇌시킨 겁니까?"
"지금은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어. 기억을 없앤 건지, 어떤지... 혹은 인격까지 건드렸을 가능성도..."
"뭐야?! 그럼 sp가 sp가 아니게 됐다고?"
"이 기기를 통해서 조작당한 거면 다시 되돌릴 수도 있지 않나?"
"그런 식은 통하지 않아. 다른 방법을 찾아야..."
"그만."
말이 튀는 가운데 배트맨의 목소리만이 냉정했다. 공기를 달구던 걱정과 초조가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배트맨은 영 히어로 세 명과 슈퍼보이가 갇힌 공간 사이를 막고 섰다. 어깨부터 늘어뜨려진 망토는 그 주인을 닮아 움직임이 정적이다.
"추측보다 슈퍼보이가 보일 수도 있는 공격성에 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변수가 많아 위험하니 밖에서 대기하라는 말은 어차피 듣지 않겠지."
"당연하죠!"
"저희 친구이자 동료입니다. 그러니 뭐든 끝까지 책임지고 싶습니다."
예상대로의 태도에 배트맨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뿐 더 말을 얹지 않았다. 벽 쪽에는 어느새 은닉되어 있던 조작 패드가 드러나있었다. 깜빡이는 붉은 버튼에 손을 올린 배트맨이 눈짓했다. 일정 거리를 물러난 셋은 각자의 포지션대을 찾아 방어 태세를 갖췄다. 또 해랑 달이랑 슈퍼맨 보여준다는 약속을 해야하나... 고글을 바로 쓴 월리가 걱정스레 투덜거렸다. 꽉 맞물린 구금튜브의 이음새가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안 쪽에서 빛이 새어나왔다. 무게가 느껴질 만큼 짙은 붉은 조명이 안을 꽉 메우고 있었다. 그 가운데 정자세로 서 있는 슈퍼보이, 코너 켄트는 주변의 붉은 빛에 온통 잠식된 것처럼 보였다. 늘 입고 있는 까만 티셔츠는 물론, 가슴 한 복판에 새겨진 붉은 S 마크는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다. 가파른 지직거림이 주변으로 뻗어나오더니 조명 몇 개가 힘없이 터져나갔다. 나머지 조명 상태도 썩 괜찮아 보이지 않는다. 이 기계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고 가동하기 위한 에너지 원도 아슬아슬하다는 것이 명백해보인다. 열린 문 안쪽으로 여럿 패여있는 주먹 자국을 훑는 배트맨의 눈이 가늘어졌다. 검은 갑주로 덮인 손이 버튼을 누르자 조명은 물을 끼얹은 듯 사그라들었다. 기계의 가동음이 사라지고 남은 고요 속에서 슈퍼보이의 손가락이 하나 까닥인다. 어둠 속에서 파란 눈이 천천히 뜨였다.
"..."
"..."
"코..."
"쉿."
"..."
한동안 아무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대치 상태가 이어졌다. 눈을 뜬 코너는 인상을 무시무시하게 찡그리곤 제 앞의 세 명을 노려보았다. 꼿꼿하게 몸을 펴자 안 그래도 굳건한 몸이 더 강해보였다. 성큼 한 발을 내딛는 순간 셋의 몸에 힘이 들어갔으나, 기세와 달리 다리가 비틀거리더니 맥없이 벽을 짚는다. 머리가 아픈듯 이마를 짜증스럽게 문지르는 손이 거칠다. 로빈이 흘끗 배트맨을 쳐다봤다. 붉은 태양인가요? 그래. 대답을 얻은 로빈의 손이 유틸리티 벨트에서 멀어졌다. 조심스럽게 양 손을 들어올린 칼더가 한 걸음 나섰다.
"도와줄까, 코너?"
사납게 끙끙거리는 소릴 내던 슈퍼보이는 신중한 목소리를 홱 노려보았다. 침착하게 들어올린 맨 손을 미심쩍게 보더니 머리를 거칠게 흔든다.
"아니. 됐다."
칼더의 눈이 조금 커졌다. 예상보다 훨씬 부드러운 반응이었다. 개폐구를 짚고 내려오는 동작은 불안하긴 해도 갑작스러운 공격성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최악의 상황은 아닐지도... 희망이 생긴 월리는 칼더 옆으로 다가갔다. 얼핏 2 대 1처럼 느껴질 수 있는 구도인데도 코너는 썩 괜찮아보였다. 눈빛은 여전히 사납고 매우매우 건방져보이긴 했지만 말이다. 월리가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헤-이 수피. 나 기억해? 네가 존경하는 친구 키드 플래시야."
"...?"
"이러면 좀 더 친근해보이려나?"
잠입 모드를 풀고 노란색으로 돌아온 수트를 가리켜 보이자 확실히 표정이 달라진다. 그것도 순한 방향으로. 좀 더 흥미가 생긴 듯 슬쩍 기울어지는 고개가 월리를 뜯어보더니 로빈을 향했다. 싱긋 웃어 보이며 손을 흔들어주자 어깨가 살짝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칼더가 차분히 설명했다.
"나는 아쿠아래드, 칼더람. 이쪽은 들었다시피 키드 플래시, 월리. 저 쪽은 로빈이야. 우린 네 친구야, 코너. 기억나?"
"...친구."
"그래, 친구. 동료. 팀메이트. 함께 훈련하고 싸우고 세상을 구하러 다녔잖아."
"너희가. 나랑?"
"그렇다니까. 기억 돌아오는 중이지?"
"확실히 너희들은... 뭔가 익숙하지만..."
어지럼증이 한결 가신 얼굴이 된 슈퍼보이가 팔짱을 꼈다. 초점이 완전히 돌아온 파란 눈이 칼더를 뜯어보고 월리로 옮겨갔다가 로빈까지 확인하곤 다시 월리로 돌아왔다. 조금 느슨해졌던 표정이 다시 불만스러워지더니 입꼬리가 삐딱하게 올라갔다.
"...흠. 같은 수준으론 보이지않는데."
저게 지금 우리 무시한거야? 약간 잠겨 있는 목소리가 내비치는 괄시에 월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로빈이 아이 마스크 너머로 눈을 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혼자 열 뻗쳐 뛰어나가선 적진에 잡혀있는 걸 구해줬더니 뭐가 어째. 유일하게 동요하지 않는 칼더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간 코너는 다소 고압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어쨌든 날 도우러 온 것 같으니. 인사는 해야겠지. 수고 많았다."
"...그래."
기억이랑 싸가지도 같이 말아먹었나. 입술이 삐죽이는 월리가 뭐라 항의할 새도 없이, 시원스레 악수를 마친 코너는 허리춤에 손을 얹고 대뜸 명령을 시작했다.
"너, 저들을 통솔해서 탈출로를 뚫어. 내가 단번에 손봐줄 수 있었겠지만 이 쓰레기같은 악당 놈들 탓에 일시적으로 힘을 빼앗겼으니까 너희들에게 맡길 수밖에."
"...음..."
"이름 제대로 불러! 그리고 우리한테 직접 말해! 아니 뭣보다 명령하지 마!"
참지 못한 월리가 빽 소리쳤다. 삽시간에 얼굴을 구긴 코너가 위협적으로 삿대질을 했다.
"지금 내게 명령한거냐?!"
"안했어! 네가 했잖아! 그리고 친구끼리 뭘 명령..."
"내게 반기를 들었단 말이지? 내 뜻에 반하고, 나를 방해하려 들다니!"
"아니라고!"
"동료라는 말이 거짓이었구나! 내가 약해진 틈을 타 속이려는 거였어!"
"뭐...!"
반팔 소매에 덮인 팔뚝이 위협적으로 불끈거렸다. 로빈의 손이 다시 벨트 쪽으로 올라갔다. 기어코 뒷목을 잡은 월리 앞을 급히 가로막은 칼더가 회유를 시도했다.
"오해야! 물론 널 도와서 탈출할거야! 우린 절대 널 속이거나 해치지 않아!"
"네 놈 말은 어떻게 믿지?! 부하가 저 모양인데!"
"코너, 내 말을...!"
"더 들을 필요가 없군!"
코너의 눈에 핏발이 섰다. 부릅뜬 눈이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핏줄이 튀어나올 것처럼 두드러진 주먹이 칼더의 멱살을 노렸지만 몸 상태가 상태이니 만큼 쉽게 피 할 수 있었다. 헛손질에도 기 죽긴 커녕 더 열이 오른 코너가 쩌렁쩌렁 고함을 질렀다.
"네 수하 놈들의 죗값까지 다 치러야할 거다!"
"거기까지."
과열된 분위기를 단번에 가라앉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코너는 등 뒤의 기척에 흠칫 놀랐다. 언제부터...? 매섭게 돌아선 슈퍼보이가 얼어붙었다. 배트맨은 이렇다 할 표정없이 코너를 마주본다. 우악스레 쥔 주먹이 천천히 내려갔다. 하프 크립토니안은 처음으로 할 말을 잃은 듯한 얼굴로 어둠과 닮은 남자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조금 얼빠져 보이는 걸음이 더듬더듬 배트맨 쪽을 향했다.
"당신..."
"책임을 묻고 싶다면 네 친구들 말고 나와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을거다."
방금 전 세 명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무뚝뚝한 어조에도 코너는 아랑곳하지 않아 보였다. 코앞까지 다가온 슈퍼보이를 배트맨은 제지하지 않는다. 얼굴을 가린 카울 쪽으로 코너가 손을 뻗었다. 난 당신을 알아... 혼란스러운 속삭임처럼 손가락이 바르르 떨리고 있다. 배트맨은 카울 겉면을 스치듯 내려가는 손을 피하지 않았으나, 그 이상의 접촉을 방지하려는 듯 미묘하게 몸을 틀었다. 눈도 깜빡이지않던 코너가 벼락같이 달려든 건 순식간이었다.
"으악!! 수피!! 배트맨한테 박치기하면 안돼!!"
월리가 비명지르듯 외치며 몸을 날렸다. 키드 플래시가 다다르기 전에 슈퍼보이의 몸이 공중에 붕 떴다. 시원하게 엎어치기 당한 코너가 눈을 끔뻑였다.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똑같은 자리에 서있는 배트맨이 덤덤히 코너를 내려다봤다. 괴성과 함께 자리를 박찬 슈퍼보이가 배트맨에게 분노를 터뜨렸다.
"당신...! 아니, 너!!! 네가 빌런놈이었구나!!! 사상 최악의 악당놈!!!"
"..."
침묵이 코너의 분노에 기름을 붙인 모양이었다. 맹수처럼 괴성을 지른 코너가 배트맨에게로 돌진했다. 까만 망토가 훅 꺼지는가 싶더니, 이번엔 발목을 제대로 차인 코너가 요란하게 휘청인다. 배트맨이 유연하게 빙글 돌았다. 내질러진 팔을 잡고 가까이 붙는가 싶더니 눈깜짝할 새에 거리를 벌렸다. 엉덩방아를 찍은 코너가 곰처럼 으르렁거렸다.
"같잖은 수작도 여기까지다 악당!!! 내가 약해졌다 하더라도 너 쯤은... 너 따윌... 너어... 르을..."
불꽃처럼 활활 타는 눈이 둔하게 끔뻑였다. 몸이 끄덕끄덕 기울더니 바닥에 쿵, 누워버린 슈퍼보이는 끈질기게 중얼거렸다. 네 노옴으으... 술수우에에... 너어어엄어가으으을거엇같...으... 거북이처럼 느리던 말이 다 멎자 눈이 완전히 감긴다. 안절부절 못하며 틈을 보던 스피드스터가 슬그머니 다가와 곁에 쭈그려앉았다. 쿡, 찔러보자 파리쫓듯 팔이 움찔거리더니 이내 작은 코골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뒤늦게 기운이 쭉 빠진 셋 사이에서 배트맨만이 초연했다. 로빈, 카나리와 애로우에게 연락해라. 아쿠아래드, 키드 플래시. 슈퍼보이를. 골치아프단 표정으로 뒷목을 주무르던 칼더가 재빨리 팔 한 쪽을 잡았다. 나머지 팔을 잡은 키드 플래시는 눈치없이 터질 거 같은 재채기를 참았다. 저를 빤히 쳐다보는 로빈에게 시선이 가만히 내려앉았다. 마뜩찮은 표정을 한 로빈이 통신하는 소리, 도로롱. 드르렁. 평화롭기 그지 없는 콧소리만이 어색한 정적을 쫓아주었다.
4.
[MOUNT JUSTICE
July 4, 14:13 EDT]
"언제까지 기다리게 하려는 거지?"
프렛츨을 다섯 그릇째 비운 월리가 분통을 터뜨렸다. 칼더는 익숙한 손길로 다시 그릇을 채웠다. 탈탈 털어도 한 그릇 분량이 나오지 않는다. 쌓인 빈 통을 한 번, 텅 빈 찬장을 한 번 본 칼더가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울프는 멀찍이 떨어진 입구에서 턱을 괴고 엎드려 있었다. 간혹 꼬리를 두 어번 털썩이고 소음을 쫓듯 귀를 쫑긋거리는 것 외엔 움직임이 없었다. 제 주인을 기다리다 지친 티가 역력하다. 격납고의 슈퍼사이클도 비슷한 상태로 시무룩해 있을 게 뻔했다. 케이브로 귀환한 지 열 두 시간도 더 넘었다. 많은 영입을 거쳐 늘 복작복작했던 기지인데 지금은 매 초가 지루할 만큼 조용하다. 머릿수를 채워야할 로빈조차 배트맨과 함께 가버렸다. 월리가 내는 '와작와작' 소리가 점점 전투적으로 변했다.
"칼더, 넌 어떻게 생각해? sp의 상태 말이야."
월리 몫의 오렌지 주스병을 만지작거리던 칼더가 천천히 대답했다.
"기억이 초기화된 건 확실하지. 물론 완전한 건 아니야. 우리 셋을 익숙하게 여겼잖아. 그러니 그 점은... 낙관적으로 생각해도 될 거 같아."
"그럼 너도 다른 쪽이 더 신경쓰이는 거지? 인격 부분 말이야! 아 그래, 물론 어제까지의 코너도 세계 제일의 나이스가이는 아니었지. 하지만 방금 전 태도처럼 재수밥맛도 아니었다고!"
"그렇지... 뭣보다, 우리를 바로 적으로 인식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태도가 급변한 게 마음에 걸려. 마치..."
칼더는 조곤히 말을 골랐다.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을 전혀 참지 못하는 것 같아."
"참지 못하는 건 익숙하지. 문제는, 제 기분 나쁘게 하면 바로 빌런 취급이잖아."
말이 잠시 멈춘 틈을 타 월리는 그릇을 탈탈 털었다. 프렛츨이 물처럼 목구멍을 넘어갔다. 그릇이 비자마자 타이밍 좋게 제타튜브가 히어로의 도착을 알렸다.
마샨 맨헌터, 0, 7
로빈, B, 0, 1
둘은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초록 피부의 화성인과 아직 수트 차림인 로빈이 걸어왔다. 월리는 가슴을 몇 번 두들긴 후 딕에게 슬쩍 말을 붙였다.
"어떻게 됐어?"
"...잘 된 거 같아. 자세한 건 지금부터 설명할게."
"야 너 기분은 좀 나아졌냐?"
"갑자기 왜?"
"아니 아까 배트맨이랑 있을 때 기분이 좀..."
"전혀? 아무 일도 없어."
태연하게 대답한 로빈은 말끔한 낯으로 척척 걸어가 화면을 띄웠다. 찝찝한 표정의 월리를 둥실 지나쳐 간 마샨이 말을 시작했다.
"먼저, 너희들이 가장 궁금해 할 코너의 상태에 대해 말해주마. 구출 직후, 코너의 상태를 면밀히 살펴보았단다. 안타깝게도, 그의 정신에 손상이 일어난 게 맞았어. 난 코너를 되돌리기 위해 의식을 살펴봤다. 자기 자리를 잃고 깊은 곳으로 가라앉은 기억을 다시 복구시키려했지만 코너 본인의 저항이 너무 강한 나머지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 생물이라면 대부분 그렇다만, 코너는 특히 누군가 제 의식을 건드리는 것에 아주 예민하니까. 결과적으로 그는 현재 기억이 온전치 않고 그 간 너희들과 함께 겪어온 다양한 경험들로부터 얻은 많은 것들도 잊어버린 상태다."
"사회화 과정이 리셋된 거라 보면 돼. 상식, 인내, 피아식별... 분노조절."
월리와 칼더가 동시에 신음소릴 냈다. 사람 좋은 얼굴로 유감을 표하는 마샨 옆에서 로빈도 과장스레 이마를 짚어보인다. 그들 모두가 코너와 함께 한 나날들을 무척 소중히 여겼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 시간들이 까다롭지 않았다고는 빈말로도 할 수 없었다. 팀메이트 간의 유대감도, 신뢰도, 뭣보다 융통성과 마음의 여유가 심히 부족했던 초반의 코너를 다시 만나게 된다니 썩 유쾌하진 않았다. 구해오면 잔뜩 골려주려고 했는데 고생은 이쪽만 하는 거 같단 생각에 머리를 감싸쥐던 월리가 번쩍 손을 들었다.
"잠깐만요! 그럼 툭하면 빌런 취급하는 것도 다 피아식별의 문제인거예요?"
"아, 그렇지만은 않다. 코너를 잡아간 일당들이 건 세뇌는 실패한 것에 가깝지만, 영향이 아주 없지는 않더구나. 명령에 충실한 젋은 빌런으로 만들려는 그들의 시도는 완전히 반대 방향의 결과를 불러왔어. 지금 코너는 자신이 히어로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단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인상을 구긴 월리가 날카롭게 반박했다.
"걘 히어로 맞는데요? 우리 모두가요!"
"그렇지. 하지만 지금 코너는 자신만이 '옳은' 히어로라고 생각하는 거야. 너무나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방해하는 모든 걸 악으로 규정해버리고 말지."
"허..."
차라리 코너-처음만남_ver0.1를 다섯 명 다루는 게 쉬울 거 같았다. 생각에 잠겨 있던 칼더가 질문했다.
"그럼 이제부터 뭘 해야하죠?"
"간단하다. 코너에게 걸린 조작은 언젠가 풀릴 거야. 하지만 막연히 기다릴 수 없지. 수면상태로 보호해둘 생각도 해보았다만 그것도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니지. 그러니 코너가 원래대로 돌아오는 과정을 촉진하는 것이 너희들이 맡을 임무다. 현재 코너는 임시 거처로 옮긴 상태야. 홀 오브 저스티스를 모방해 만든 눈속임용 본부지만 현 시각까지 사용되지 않은 곳이란다. 좌표는 등록되어 있으니 제타튜브를 이용하면 편할 거다."
"어... 그러니까, 우리가 코너랑 같이 있어야 하는 건가요? 하프 크립토니안의 재사회화를 담당하라구요?"
"그렇지. 다른 팀원들은 진행중인 일이 있고, 무엇보다 코너가 아는 얼굴들이 맡는 것이 좋잖니. 걱정말거라, 코너는 붉은 태양의 영향 탓에 전투력이 극히 낮아진 상태니까. 그리고 오기 전에 판단한 바로는, 행동거지는 거칠어도 너희들에게 분명 호감을 갖고 있어. 조금 비협조적일지라도 비위를 맞춰준다면 싸움까지 번질 일은 없을거다. 블랙 카나리와 나, 레드 토네이도가 주기적으로 보호관찰을 맡을 거고."
"예에..."
친절한 설명에도 키드 플래시와 아쿠아래드의 표정은 별로 밝아지지 않았다. 애보기를 하란거네... 어른 히어로의 앞이라 참고 있는 말이 영 히어로들의 머릿속을 통통 튀어다녔다. 긴긴 한숨을 쉰 월리는 별 수 없단 표정으로 깍지 낀 손에 머리를 기댔다. 잘난 내가 친구 잘못 둔 죄지 뭐. 꼭 지게를 옮겨 받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칼더가 신경쓰이는 의문을 던졌다.
"배트맨도 저희와 함께 코너를 대면했는데, 그럼 배트맨은 언제부터 동참하는..."
"배트맨은 빠질거야."
마샨 대신 로빈이 대답을 낚아채갔다. 그 바람에 배트맨은 바쁘겠거니, 막연히 생각하던 월리의 궁금증마저 끌어당기고 말았다.
"왜?"
"...이 임무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어."
"하긴, 기술이라면 모를까 인성을 가르치는데 누가 배트맨을..."
"그런 이유가 아니야."
날카롭게 말을 끊은 로빈의 서슬에 월리가 어정쩡하게 시선을 피했다. 딕은 그 외의 다른 이가 멘토에 관한 평가를 건드리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화성인의 나긋한 목소리가 대답을 이어갔다.
"코너가 배트맨에게 유달리 감정변화를 크게 보이기 때문이란다. 처음 깨어났을 때도 배트맨의 인상착의를 들먹이며 그를 집요하게 찾는 바람에 레드 토네이도와 내가 진정시켜야했지."
"헐 그렇구나. 하긴 그 때 호되게 당하긴 했었거든요. 제대로 화났나보네"
충분히 그럴만하다는 표정으로 월리가 손바닥에 주먹을 탁 내리쳤다. 칼더는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단지 싸웠기 때문에... 그런겁니까? 코너는 저희에게도 분노를 표출했었는데..."
"오, 물론 아니란다. 그럼 너희에게 맡길 수도 없었겠지. 같이 지내다보면 아이들끼리는 싸우기 마련이잖니. 혹시 같이 지내면서 발생할 분쟁에 속수무책이 될 것이 걱정이라면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단다. 너무 격하지만 않으면..."
"아, 네. 물론이죠. 암요암요. 걱정 붙들어 매세요. 그럼 다시 배트맨 이야기로 돌아와서, 왜 슈피가 고담의 투사를 싫어한다구요? 계속 잔소리해서? 역시 쫌 악당처럼 생겨서 그런가? 왜, 배트맨은 까만색에 표정도 무섭고 귀도 이렇게 뾰죽하고..."
양 검지를 머리 위로 세워 토끼처럼 쫑긋거리는 손짓을 해보이는 월리는 퍽 진지했다. 딕이 짜증스럽게 쏘아붙였다.
"코너는 지금 선입견이랄게 없어서 겉모습으로 악당이냐 아니냐를 판별하지 않아. 그냥 배트맨의 존재가 코너한테는... 이슈야. 그렇게만 이해하면 돼."
"앗 혹시! 선입견이 배트맨을 만나고 생겼다던ㄱ..."
"내가. 아니라고. 하잖아."
으응... 먄... 꼭 누구처럼 세모꼴로 매서워진 눈매를 피해 물러난 월리가 멀뚱히 서 있는 마샨을 흘끔거렸다. 지극히 평화로운 표정으로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화성인이 결론짓듯 말했다.
"그럼 잘 부탁한다. 걱정마렴. 아이들은 빨리 자라니까 말이다. 슈퍼보이는 더 그럴거란다."
득도한 신선 같은 어조였다.
5.
[THE WATCHTOWER
July 4, 11:27 EDT]
"아, 배트맨."
우아한 산양처럼 다가오는 마샨에게 배트맨은 느리게 고개만 끄덕여보인다. 말 수 적은 동료가 익숙한 화성인은 그의 옆에 편히 뒷짐을 지고 섰다. 망토 두른 십자군이 지켜보고 있는 매직미러 너머에는 코너 켄트가 앉아있었다. 입술을 미어져라 내민 표정과 달리 건네준 도화지는 성실히 채워지고 있었다. 바닥에는 반쯤 허물어진 레고가 놓여있다. 찰흙은 몇 번 주무르더니 시큰둥하게 벽에 내던지고 말았다. 퍼즐은 손도 대지 않은 반면 간단한 회로 설계가 들어있는 과학 탐구 세트는 다섯 개 모두 완성되어있다. 음악을 흘러나오고 있었을 라디오는 전부 분해된 채였다. 뜯어낸 부품 중 일부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있다. 레고 몇 조각과 목공용 풀이 더해진 실루엣은 그럴듯한 바이크처럼 보였다. 마샨에 의해 깨어난 슈퍼보이는 이 방에서 두 시간 가량을 보내는 중이다. 내내 곁을 지켰냐고 묻는 대신 마샨은 다른 말을 꺼냈다.
"어떤 것 같나요?"
"처음 내린 추측과 똑같네. 몸집만 큰 어린아이. 절제되지 않은 영웅심 탓에 고집과 폭력성이 늘었어."
"그렇군요. 근본이 선해서 다행이라고 해야할까요."
"어느 한 쪽으로 단정지을 수 없을 것 같군."
"무슨 뜻입니까?"
카울 너머 시선은 잔잔했다. 모든 것을 관찰하고 증거에 기반한 추측을 통해 미래를 대비하는 탐정의 예리한 시선은 여전하나, 다른 눈빛 또한 거기 있었다. 마샨이 익히 아는 지구인의 감정이다. 매일 다른 경험을 갈구하며 눈을 반짝이는 그의 조카를 볼 때마다 마샨이 느끼는 마음. 카울과 망토로 마음을 숨기는 투사를 위해 마샨은 제가 느낀 것을 내색하지 않기로 한다.
"백지 상태의 마음은 기준도, 규칙도, 다른 영향도 없이 오직 자신만이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자기중심적이게 될 수밖에 없어. 코너의 영웅심이 위험한 이유도 그 때문이고. 그렇기에 다른 존재와의 교류가 필요해. 이미 쌓인 유대감이 깊고, 코너의 잠재의식에 가라앉은 호감을 다시 불러올 수 있으며, 더불어 슈퍼보이의 세상이 넓어지게 만들어줄 매개체가 되어주고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상대."
"로빈, 아쿠아래드, 키드 플래시처럼 믿음직한 친구들 말이지요."
"음. 그 아이들이라면 괜찮을거야."
사려깊게 고개를 끄덕인 마샨은 꼼꼼히 도화지를 색칠하는 코너에게 시선을 두며 지나가듯 물었다.
"여전히 동참하지 않을 건가요?"
"역효과만 불러올거야."
"나는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대상에 당신도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무반응에서 부정을 읽은 마샨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유리 밖에서 오고가는 대화를 꿈에도 모른 채 코너는 까만 색연필을 거의 반토막내며 채색에 열을 올리는 중이었다.
"사견입니다만,"
"..."
"코너의 '잠재의식에 가라앉은 호감' 이 있는 상대에 당신도 포함되지 않나요?"
질문 아닌 질문에 브루스는 시선을 조금 비끼듯 할 뿐 묵묵부답이었다. 어느덧 색칠을 끝낸 코너 켄트는 도화지를 툭툭 털었다. 8절지 크기의 공백이었던 종이는 검은 색과 회색이 군데군데 번져있었다. 머리 위로 솟은 귀와 목부터 어깨로 떨어지며 몸을 감싼 검은 망토. 허리의 노란 선은 힘조절을 잘못 했는지 몇 번 덧그린 흔적이 보인다. 가슴팍에는 톱니같은 무늬가 삐죽삐죽 그려져있다. 엉성한 솜씨지만 윗쪽의 귀 부분은 꼼꼼하게 살렸다. 그는 혼자가 아니다. 꾹꾹 눌러 그린 다른 이가 곁에 서있다. 제각기 자리를 차지한 둘의 손이 미묘하게 겹쳐져있다. 파란 눈은 배트맨의 카울 아랫부분을 뚫어져라 노려본다. 아직 입을 그리지 않은 맨 얼굴에 신중하게 펜을 가져간다. 종이에 닿을락말락 떨리는 손끝이 오래 머물렀다. 머뭇거리는 손이 그릴 모양을 정하는 것보다 실수로 닿은 펜촉이 번진 자국을 내는 것이 먼저였다. 슈퍼보이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종이를 거칠게 구겨버린 그의 손에서 펜이 두 동강났다. 분이 치밀어오르는지 책상째로 엎어버린 코너가 잡히는 물건을 마구 두들기기 시작한다. 급작스러운 파괴로 점철되는 광경에도 마샨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참을성있게 대답을 기다렸다. 침묵 끝에 배트맨이 답한다.
"...착각이야."
6.
[HALL OF JUSTICE_02
July 6, 09:01 EDT]
키드 플래시, B, 0, 3
로빈, B, 0, 1
아쿠아래드, B, 0, 2
더플백을 맨 월리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토요일 아침식사인 생크림 와플과 치즈 뿌린 베이컨과 육즙이 탱글한 소시지와 시리얼 한 그릇을 해치운지 2분밖에 되지 않았다. 더 먹고 싶기도 하고 한 숨 잔 다음에 다시 먹고 싶기도 하다. 쨍한 햇볕에 딕은 선글라스를 고쳐썼다. 셋이 걸어나오자 제타튜브의 입구는 얼핏 바위처럼 보이는 이중문으로 숨겨졌다. 여기서 슈퍼보이가 있는 홀로 들어가려면 십 오 분 정도 걸어야했다.
조금 지나자 정갈한 잔디밭이 펼쳐졌다. 양 옆으로 야트막한 정원수가 울타리를 이루고 가운데는 맑은 분수까지 있다. 추상적인 금빛 조각상을 보며 월리가 휘파람을 불었다.
"여태껏 안 쓴 임시 거처래서 기대안했는데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네?"
"사용할 일이 없었다해도 엄연한 리그 공식 건물이니까."
하얀 계단을 올라 유리로 된 정문을 열자 익숙한 얼굴이 그들을 맞이했다. 정확히는 홀 정중앙에 팔짱을 끼고석상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게임에서 플레이어를 맞이하는 보스같은 느낌이다. 방문을 예상했는지 셋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다. 씩 웃는 입매는 호의적이지만 그걸 상쇄할만큼 태도가 거만했다. 반갑지만 반갑지않다. 코너 옆에 선 블랙 카나리가 없었다면 발걸음도 경쾌하게 백스텝을 밟았을지도 모르겠다.
"늦었군."
안 늦었어 새꺄. 월리가 작게 투덜거렸다. 아직 슈퍼히어링이 돌아오지 않은 코너는 뭐 씹은 듯 일그러진 미소를 사죄로 해석한 것처럼 보였다. 만족스럽게 웃는 얼굴로 보아 이미 제멋대로 용서를 끝낸 모양이다. 카나리가 먼저 말을 건넸다.
"모두들 잘 왔다. 코너가 너희들을 다시 만나길 아주 기대하고 있었단다."
"아주는 아닌데. "
"코너, 계속 말했다시피..."
"그래 뭐, 어쨌든 내 팀원들이라니까. 반갑다. 아주는 아니지만. "
입꼬리가 바르르 떨리는 월리가 딕에게 속삭였다. 너 용케도 웃는다? 입꼬리가 사악하게 올라간 딕이 킬킬거렸다. 미래를 생각해봐 KF. 코너가 제정신 찾으면 놀릴 거리가 산더미라고. 웃음기가 싹 빠진 코너가 으르렁거렸다.
"뭘 속닥거려?"
"드디어 대장님을 만나게 되어 너무 설렌다는 말을 하고 있었죠."
능청스러운 말은 명백한 놀림조지만 슈퍼보이를 속이기엔 더없이 충분했다. 뿌듯한 표정이 된 코너 앞으로 다이나가 한 걸음 나왔다. 짜놓은 설정을 다시 한 번 읊는 목소리가 능숙했다.
"모두 알고 있겠지만, 한 번 더 설명하마. 여기가 너희들의 본부다. 여기서 함께 훈련하고 코너의 잃어버린 힘을 찾도록 하는 것이 최우선 목표다. 그 전까진 어떤 형태로든 히어로 활동을 하지 않고 회복에만 집중하기로 했고. 물론 빌런을 찾아다니는 것도 안돼."
"흥, 오래 걸리지 않을걸. 난 슈퍼맨이니까."
근엄한 말에 월리가 눈썹을 들썩였다. 슈퍼보이란 말에 반발심을 비치는 코너를 위해 현재 그의 코드명이 슈퍼맨으로 지정해놓았단 건 미리 고지받았지만, 영 어색하다. 칼더가 제 몫의 질문을 했다.
"슈퍼맨, 당신의 팀메이트로서 요청드릴 게 있습니다."
"뭔데."
"존대를 요구했다는 말은 분명히 들었습니다만(월리는 표정관리를 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친목도모와 빠른 힘의 회복을 위해 편한 말투를 사용하고 싶습니다만."
"그게 효율적일 거 같은데. 너희들의 유대가 돈독해질 수록 힘을 되찾는 것도 빠를테니까."
다이나가 거들었다. 눈썹이 솟구친 코너가 입을 삐죽거렸지만, 그러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한다. 덤으로 슈퍼맨이 아닌 코너라는 호칭을 사용해도 괜찮다는 허락까지 받아낸 칼더는 초짜 배우가 된 느낌에 머쓱한 기침을 뱉었다. 아이고 대장, 이렇게 큰 관용을 베푸시다니요. 로빈이 허리를 숙여보이자 카나리가 경고하는 눈길을 던졌다. 칭찬이니 흐뭇한 느낌이 들어야하는데 왜 기분이 나쁜건지 아리송한 코너를 두고 몇 가지 더 당부를 마친 블랙 카나리는 떠났다. 어색함이 줄자처럼 거리를 재는 공기가 앞으로의 일이 쉽게 풀리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배정받은 개인실에 들어가는 딕과 칼더와 달리, 코너는 제 방을 뚱하니 바라볼뿐 움직이지 않았다. 더플백을 침대에 던져놓은 월리는 자연스럽게 간식을 찾으러 부엌 쪽으로 향했다. 둔탁한 발걸음이 뒤를 따랐다.
"...너도 줘?"
"뭘?"
"뭐긴... 먹을 거. 마실 거... 간식말이야."
"배 고프지 않다."
"어... 그래, 그럼."
멋쩍게 답한 월리는 서랍을 뒤져 찾아낸 봉지들을 끌어안고 몸을 돌렸다. 방 안으로 총총 걷는 뒤로는 아무 발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한동안 홀은 조용했다. 칼더는 아틀란티스에서 전달받은 제 보고서를 작성 중이었고 로빈은 짐 정리 후 학교 숙제를 빠르게 해치우고 있었고 월리는 빵빵한 나초 봉지를 비우는 것에 열중했다. 가루까지 탈탈 털어먹은 봉지를 착착 접고 다시 나온 월리는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똑같은 자리에 서 있는 코너를 발견하고 조금 놀랐다.
"sp, 계속 거기 있었어?"
"..."
"음... 앉아있지? 저 넓은 소파에 따로 올 사람도 없는데."
"..."
"그으래..."
이번엔 냉장고를 습격한 월리는 도넛 상자를 꺼내들고 머뭇머뭇 물었다.
"이건 먹을래?"
"배 안 고프다."
"어어... 그래. 먹고 싶을 때 먹어."
"넌 왜 먹어?"
"...왤 거 같냐? 먹고 싶으니까지."
"먹지 마. 밥 시간 아니야."
월리는 깊디 깊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피곤했다.
"밥 시간 아니어도 내가 먹고 싶으면 먹어도 되는거야."
"방금 전에도 먹었잖아."
"어 나도 알아. 근데 지금도 먹고 싶거든."
"작작 처먹어."
"처먹... 말 좀 곱게 해라. 그리고 먹는 걸로 꼽주지 마."
"..."
"눈도 좀 곱게 떠줄래?"
"명령하지 마!"
"뭐래! 좋게 말한 거거든!"
상자를 퍽 내려놓은 월리가 빽 소리쳤다.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선 코너가 이를 가는 게 보였다. 대리석 표면을 누르는 손마디가 하얗게 변해있었다. 평소대로였다면 식탁이 단번에 부서졌을 것이다. 높은 언성을 들은 칼더와 딕이 재빨리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쟤가 자꾸 시비를 걸잖아!"
"KF. 우리 목적을 잊지 마. 참을 수록 빨리 끝나고 역전의 기회가 올거야."
딕이 쾌활한 목소리로 중재했다. 씩씩거리던 코너가 월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칼더에게 윽박질렀다.
"저 놈이 의무를 다하지 않았어!"
"의으으무우우우? 너 할 말 있으면 나한테 똑바로오웁읍브븝..."
"어이쿠 도넛이 좀 컸네. 그래도 다 먹을 수 있지?"
서슴없이 글레이즈드 도넛을 쑤셔넣는 딕과 월리가 실랑이하게 두고 칼더가 차분하게 물었다.
"무슨 소린지 설명해줄래 코너?"
"너흰 내 힘을 돌려놓기 위해 노력해야하잖아! 근데 그러지 않았어!"
두 개째의 도넛때문에 입이 막힌 월리가 어이없다는 제스처를 취해보였다. 칼더는 인내심을 불러모아 조근조근 설명했다.
"코너, 지금은 잠시 잊었겠지만 월리는 스피드스터야. 남들 보다 몇 배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해. 그는 아주 많이 먹고 자주 먹어. 너도 익숙해질거야."
코너의 숨소리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맞는 말을 들어서 더 기분이 나빠진 것처럼 보였다. 칼더는 친구들을 다뤄온 경험과 최연장자의 책임감을 끌어모았다. 설득이 길어질 것 같았다. 거센 콧김을 뿜던 코너가 이를 악문 소리를 말했다.
"자꾸 먹기만 하면 내 목적을 달성할 수 없어."
"'우리'목적이지, 코너."
"뭐든 간에! 너는 끊임없이 먹을 거고! 너희도 방 안에만 있으면! 나는 언제 힘을 찾으란 거야?!"
"크헉, 헥... 야! 불만이면 저 밖에서 일광욕이라도 하읍브븝...!"
"미안미안, 이게 마지막이야."
소란 속에 칼더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그럼... 뭘 하고 싶은데?"
"..."
사납게 치켜뜬 눈빛에서 독기가 조금 빠져나갔다. 입술이 일그러질 정도로 꽉 깨문 코너가 땅바닥을 노려봤다. 로빈과의 팔싸움과 입을 메운 도넛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월리가 슬쩍 다가왔다. 옅어져가는 주근깨 자국과 녹색 눈이 빛나는 얼굴이 속 썩이는 재주가 비상한 친구를 바라본다.
"야, 슈피."
"..."
"게임 좋아해?"
[HALL OF JUSTICE_02
July 6, 19:39 EDT]
이름답게 회오리처럼 날아 정문으로 착지한 레드 토네이도가 철컥철컥 계단을 올랐다. 첫 날의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파견된 그는 문을 열자마자 새어나오는 왁자지껄한 소리에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예쓰! 서브 들어갔고요!"
"큭...!"
"유-후! 키드 플래시! 또 1점을 따냅니다! 관중들이 환호하고 있습니다! 월-리! 월-리! 워어어얼-리!"
"반칙이다!"
"아니야 코너. 정당한 승부였어."
회의용 테이블을 끌어놓은 공간은 엉망진창이었다. 원래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 가구들은 죄 벽으로 내몰린 상태였고, 뜯긴 포장지와 해동된 피자가 달라붙은 상자들이 여기저기 널부러져있다. 내용물이 입구로 새어나오는 중인 음료수 병도 종류별로 화려했다. 바닥을 쳐다본 레드 토네이도는 두 다리를 접어넣고 둥둥 뜨는 것을 택했다. 승리의 춤을 추던 월리가 토네이도를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요 토네이도! 오셨네요!"
"안녕. 키드 플래시. 턱에 음식물이 묻어있다."
분통을 터뜨리는 코너가 보란듯 소리 높여 웃고 있던 로빈이 다가왔다.
"보호 관찰을 위해 온 거죠?"
"그래. 연관된 질문으로, 지금 뭘하는 중이었지?"
"기존 룰에서 이것저것 더 추가한 탁ㄱ..."
"시각적 반응 속도와 손의 민첩성을 향상시키고 팀원 간의 협동과 건전한 경쟁심을 고취시키는 훈련이다."
자신만만한 코너의 대답에 턱에 묻은 소스를 닦던 월리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남은 피자 반 판을 둘둘 말아 입에 넣으며 마저 웅얼거렸다.
"코어 마리 마자오."
"처음엔 의심스러웠지만 효과가 있다. 오전보다 강해진 기분이 들어. "
뿌듯하게 설명하는 코너 뒤에서 셋은 천연덕스러운 눈빛을 했다. 다소 돌려말하긴 했어도 거짓말은 아니니까 뭐. 칼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평가하실 건가요?"
레드 토네이도는 다시 꼼꼼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혈색이 올라 상기된 코너 켄트의 얼굴과 웃음기가 만연한 영 저스티스 히어로들. 기둥에 튄 정체불명의 자국과 후각 센서를 끊임없이 자극하는 갖가지 냄새들, 바닥이 푹 주저앉은 소파와 개수대를 꽉 채운 여러 도구들. 레드 토네이도는 아무런 가감없이 대답했다.
"비위생적이야."
7.
[BATCAVE
July 24, 00:08 EDT]
"브루스!"
새처럼 날아들어온 딕이 소리쳤다. 카울을 쓰려던 브루스가 손을 멈추고 울새를 바라본다. 만난 이후로 하루가 다르게 크고 있지만 몸놀림만은 언제나 가벼운 울새가 폴짝폴짝 다가왔다. 경쾌한 걸음걸음마다 다정한 눈빛이 내려앉는다.
"어서 오거라 딕. 이 시간에..."
"내가 딱 맞춰 왔네요!"
"뭘 말이니."
"패트롤이지 뭐긴 뭐예요! 이 분만 기다려요!"
포르르 뛰어나가려는 어깨에 손이 닿았다. 이제 고개를 빼지 않아도 브루스를 충분히 볼 수 있는 딕이 갸웃했다. 천진한 눈빛, 이미 브루스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알면서도 할 거고, 그러니까 지금은 모른척 굴거란 뜻을 고스란히 내보인 얼굴이다. 브루스는 나직하게 말했다.
"너는 당분간 패트롤에 참가하지 않는다고 결정했잖니."
"제 '결정'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요. 그리고 당분간이란게 언제죠? 벌써 다 지난 거 아니에요? 배트맨의 시간은 남들보다 늦게 가나요?"
"어림없다."
"불공평해!"
딕이 왈칵 짜증을 냈다. 발이 동굴 바닥을 힘차게 굴렀다. 텅, 소리는 해가 갈 수록 더 크고 넓게 울려퍼진다. 브루스는 성질이 팍팍 묻어나는 제스처를 휘두르며 항의하는 아이를 담담히 바라봤다. 아직은 저보다 작은 키가 얼마쯤 더 컸는지 가늠하는 눈빛을 읽은 딕이 이를 갈았다.
"집중해요!"
"난 언제나 집중한다 로빈."
"로빈 일은 안 시키면서 로빈이래! 난 원래도 영 저스티스 일과 고담 패트롤을 병행했다구요! 지금도 아무 문제없어요!"
"내 기억으론 영 저스티스 일과 패트롤의 비율을 7:3 정도로 맞춰야 했던 것 같다만. 그리고 네가 원하던 거였잖니. 배운 걸 쓸모있게 써보고 싶다, 아니면 왜 가르치냐고 했었지. 좋은 말이었다."
"그 때랑 지금은 달라요! 저더러 엄청 컸다면서요! 체력도 더 붙어서 투잡쯤은 문제없다구요!"
"네가 지금 맡은 임무는 보다 까다롭다는 걸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애보기가요?"
"딕."
브루스가 엄한 눈빛을 했다. 딕이 아는 눈빛 중 가장 예리하고 채도가 맑은 벽안이 곧게 다가왔다.
"코너의 상태가 손쉽기 때문에 너희 영 저스티스 리그, 그 중에서도 너희 셋에게 위임한 것이 아니다. 리그의 어떤 히어로보다 너희가 제격이기 때문에 맡긴 거야. 그를 안정시키는 일에 가장 필요한 것은 초인적인 능력이나 히어로로서의 경력이 아닌 유대감이니까."
"알아요. 우린 잘해내고 있잖아요. 카나리도, 마샨도... 브루스도 나한테 그렇게 말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더 그 임무에 집중해야 한다. 이 일은 날이 갈 수록 더 까다로워지는 종류의 임무니 말이다. 여러 요인이 있지만 코너가 회복하고 있는 힘도 그 중 하나지. 너희들의 모의격투 보고서를 살펴보았다. 전보다 승률이 확연히 올라갔더구나."
"안 그래도 제 패배율을 보고 잔소리 안 하시나 했어요."
"네가 일부러 져주는 걸 안단다. 코너의 정서회복을 누구보다 신경쓰는 것도 알아."
급히 오느라 헝크러진 머리카락에 살며시 손가락이 닿았다. 쓰다듬는다기보단 결을 정리해주는 것에 가까운 접촉이 한동안 이어졌다. 딕은 부러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의 손길이 닿으면 입매가 누그러지는 것이 버릇이 되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코너의 기억도 상당히 회복되었고 감정조절도 점점 능숙해지고 있다. 그가 완전히 안정될 때까진 네 지금 임무 하나를 우선하는 게 좋겠구나."
"고작 며칠로 이러는 게 아니잖아요."
딕이 억눌린 목소리를 냈다. 브루스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코너의 상태가 리셋되기 전에, 그가 적에게 잡히기 전에, 다짜고짜 혼자 뛰쳐나가기 전부터..."
훌쩍 커버린 어깨가 단단히 굳어진다.
"...저랑, 보내는 시간이 줄었잖아요."
"그건..."
브루스가 드물게 망설였다. 해줄 수 있는 설명은 있었지만 로빈의 섭섭함을 더 부추기지 않는 표현을 고르느라 입술이 느리게 달싹였다.
"슈퍼보이가 요청한 훈련을 위해서... 애초에 슈퍼보이에게 나와의 훈련을 추천해준 건 너 아니었니?"
"그건...! 그렇지만요!"
답답해진 딕이 성가신 파리를 쫓는 새처럼 머리를 흔들었다. 방금 정돈해준 머리카락이 가차없이 흐트러졌다. 딕은 정말로 억울했다. 생각하는 걸 전부 토로하자니 브루스가 모르는 게 많았다. 정확히는 눈치채지 못한 것이.
딕이 코너의 이상을 감지한 것은 꽤 오래전부터였다. 맨 처음 포착한 단서는 그의 태도였다. 리그의 멤버는 많았으나, 영 저스티스 리그에게 임무를 전달하러 오는 히어로들은 한정되어 있었다. 딕과 딕의 팀메이트들은 리그의 히어로에 대해 수다를 떨곤 했는데 자연스럽게 그들과 얼굴을 마주칠 일이 많은 히어로들이 단골 소재가 됐다. 그들 모두가 리그의 히어로와 관계가 깊었기 때문에-영 저스티스 리그는 사이드킥이라는 표현을 잘 쓰지 않는다-어떤 리그 멤버든 한 마디씩 나올 말이 많았다. 블랙 카나리를 보면 어른이란 게 뭔지 느낀다던가, 레드 토네이도가 새 몸을 하고 나타나면 어떤 모습일 거 같다던가, 마샨은 왜 존이란 이름을 좋아하는 걸까 하는 것들. 진지하게 나누는 토론과는 거리가 먼, 임무 중간중간이나 휴식 시간에 별 생각없이 나누는 이야기들이었다.
그의 멘토인 배트맨에 대해 나오는 말은 한결같았다. 무시무시하다. 메타휴먼이 아니라는 게 지구, 어쩌면 우주 최대의 미스터리일 거다. 카울 벗은 얼굴 한 번 보고싶은데 보면 돌이 될 거 같다 등등. 배트맨이 얼마나 무섭게 느껴지느냐에 대한 말을 하다보면 시간이 금방 갔다. 배트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대화의 흐름을 주도하는 건 늘 딕이었다. 가지각색으로 나오는 표현을 들으며 딕은 킬킬 웃고 맞장구를 쳤다. 그는 여유로웠다. 배트맨이 얼마나 무서운지 이렇게 떠들 수 있다는 건 그만큼 그의 멘토가 의외로 친근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또한 그의 멘토가 범접할 수 없을만큼 무시무시하고 절대적인 통솔력(월리는 잔소리꾼이라고 했지만)을 가진 존재로 평가받을 수록 그 박쥐와 합을 이루는 로빈, 즉 다이나믹 듀오의 위상도 드높아졌다. 실제로 딕이 곧잘 듣는 말이 '넌 어떻게 배트맨이랑 사냐' 였으니까. 그럼 딕은 짐짓 과장된 겸손함을 내보이며 대답했다. '나도 겨우 하는거지 뭐.' 그런 평을 듣는 건 늘 기분 좋았다. '그' 배트맨과 나란히 하는 유일한 존재. 그리고... 배트맨의 카울 아래 있는 면모를 아는 유일한 존재. 다정함과 상냥함. 카울을 벗고 딕에게 눈을 찡긋해보이기도 하는, '배트맨답지않은' 짓궂음 같은 것. 딕은 이런 평가가 계속 될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흐름에 돌을 던진 것이 슈퍼보이였다. 여느때처럼 배트맨 무서워 돌림노래를 부르던 팀메이트들 사이에서 멋쩍은 목소리가 하나 끼어들었던 것이다.
"난 배트맨이 그렇게 무서운 사람은 아닌 거 같던데."
제각기 편한 자세로 눕거나 앉아 떠들던 히어로들의 시선이 한 쪽에 쏠렸다. 울프의 흰 갈기를 쓰다듬던 코너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 표정에서 수줍음이 느껴진다는 것을 알아채자 갑자기 뒷목이 당겨오는 느낌이 들었다. 딕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수롭잖게 말했다.
"코너 말도 맞아. 익숙해지면 그렇게까지 무섭진 않아. 맨 얼굴을 봐도 소금석상이 되진..."
"...난 배트맨이 상냥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이번엔 딕의 입가가 제대로 굳어버렸다. 월리가 워어~ 요란하게 반박하는 것 덕에 아무도 그의 표정을 알지 못한 것이 천운이었다. 슈피, 머리 괜찮아? 어디 아프냐? 너 또 우리 몰래 루터한테 약 같은 거 받아왔어? 헤이 미스엠, 코너 좀 살펴봐주라. 얘가 또 이상하게 변하면 골치아프다구. 호들갑을 떠는 월리에게 코너가 던진 쿠션이 날아갔다. 천뭉치치곤 꽤 아픈 소리가 울려퍼지고, 웃음이 킥킥 터져나왔다. 그걸로 코너의 돌발발언은 유야무야 넘어가는 듯 싶었다. 딕만 빼고.
설령 딕이 세계 제일의 탐정은 아닐지라도 그는 세계 제일의 탐정에게서 배움을 전수받은 로빈이었다. 탐정은 아무리 사소한 흔적이라도 가볍게 넘기지 않았다. 딕은 먼저 배트맨의 지난 행적을 샅샅이 뜯어보았다. 물론 브루스의 24시간 정돈 늘 꿰고 있지만, 그 당연함 탓에 놓친 게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없었다. 코너 켄트-슈퍼보이에게 따로 접촉했다거나, 둘이 우연히 임무 현장에서 만났다거나 하는 일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럼 남은 건 자명했다. 코너는 배트맨이 보이는 잠깐의 모습, 즉 임무를 전달하러 왔다거나 보고를 받으며 덧붙이는 간단한 평가에서 상냥함을 발견한 것이다.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딕은 자문했다. 배트맨의 카울은 한 겹일 뿐이지만 가면으로 숨겨지는 것은 아주 많았다. 브루스가 두른 박쥐의 갑주를 깨고 그 속을 알아챈 자가 있다고? 딕은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한정적이었다. 가령 딕같은 사람. 그의 로빈. 하지만 코너는 딕도 아니고 로빈은 더더욱 아니다.
딕은 코너가 잠깐의 착각에 빠졌다고 생각했다. 슈퍼맨의 영향도 있을거야. 많은 갈등을 겪고 겨우 서로를 받아들인 둘이니 최대한 관계를 잘 이끌고 싶었겠지. 그 친목도모의 과정에서 서로의 사적인 생활이나 동료 이야기가 나오는 건 당연해. 그리고 슈퍼맨은... 월즈 파이니스트니까. 코너가 아는 배트맨의 이미지에 슈퍼맨의 신뢰와 호감이 덧씌워진거야. 원래 모를 수록 좋아하기 쉬운 법이라잖아. 그래. 그런거지. 새벽까지 천장을 노려보던 딕은 결론을 내고서야 겨우 눈을 감았다. 그래. 한 때의 콩깍지일거야.
하지만 이대로 가만 내버려두기엔 찝찝했다. 코너의 수줍은 표정이 자꾸만 거슬렸다. 그래서 딕은 확실히 친구의 착각을 바로잡아주기로 했다. 그는 코너의 성미를 잘 알았다. 분명 정의로운 마음을 가진 히어로지만 코너는 예나 지금이나 다혈질이었고 누군가 제게 이래라 저래라하는 것을 유독 참지 못했다. 그러니... 배트맨과의 궁합은 최악이라 이거야. 딕은 씨익 웃었다. 배트맨과 함께 일할 수 있는 건 로빈뿐이라는 건 자명한 일 아닌가? 코너는 슈퍼보이지 로빈이 아니니, 둘을 붙여놓기만 하면 일사천리로 정리될 문제였다. 로빈이 추천하는 배트맨과의 일대일 훈련을 듣는 코너의 눈이 반짝거렸다. 네가 훈련받는 동안 나는 다른 임무에 집중할테니까 방해는 걱정 말라며, 딕은 싱글싱글 웃었다. 사사건건 부딪치고 명령을 죽어라 듣지 않는 코너를 겪은 배트맨은 로빈을 더 반갑게 여길거야. 뭐, 그러던가... 중얼거리면서도 귓가를 붉히는 슈퍼보이를 향한 눈이 곱게 휘어졌다. 친구야, 이게 다 널 위해서야.
그런데 그 누가 알았을까. 하루만에 박차고 나와 배트맨이 상냥하다니 내가 미쳤지, 이를 갈아야 마땅했던 코너가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을 넘게 훈련에 참여할줄은. 어른 히어로라면 단칼에 귀찮다며 내쳤을 브루스지만 코너는 훈련시간보다 일찍 와서 옆을 기웃거려도, 훈련이 다 끝나고도 재깍 가지 않고 옆에서 얼쩡거려도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브루스가 아이에게 무르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게 딕이었으니까. 로빈의 훈련 스케줄에 슈퍼보이의 이름이 추가되자 딕은 약이 올라서 미칠 지경이었다. 졸지에 박쥐의 날개 아래를 공유하게 된 울새는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몸부림쳤다. 훈련실 벽을 한 바퀴 두른 주먹 자국에 놀란 브루스가 딕을 데리고 여러 레크리에이션을 같이 한 건 좋았다. 계곡 리프팅이며 스노우보드, 캠핑카까지 다 좋았지만... 그건 그거였고, 근본적인 문제는 그대로였다. 딕은 죄없는 훈련더미를 마구 공격하며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든 상황을 원래대로 돌려놔야했다. 배트맨과 로빈은 다이나믹 듀오였다. 딕의 최애별명이 난데없이 다이나믹 트리오로 바뀌는 것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그런데, 코너가 또다시 먼저 일을 친 것이다.
생각하기 싫은 기억이 떠오르자 딕이 인상을 되는대로 찌푸렸다. 브루스가 달래듯 어깨를 감쌌다. 아까 보다 무게를 담은 손이 부드럽게 내려앉는다. 결국 기분이 꺾인 딕은 손등 위로 투정부리듯 턱을 올렸다.
"설마 그게 그렇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구요..."
"그건 나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일로 일어난 여파가 여기까지 올 줄도 전혀..."
"슈퍼보이의 현재 상태는 네 탓이 전혀 아니다."
"알아요, 지금 코너를 돌보는 건 죄책감이 아니라 그와의 우정때문이에요. 다만..."
딕이 껄끄러운 눈빛을 했다. 정말이지 제 입으로 확인시켜주고 싶진 않았건만.
"...그 일을 봤으니까 말하는건데, 코너가 완전히 원상태로 돌아오려면 역시..."
"..."
"아니, 아니에요. 우리는 괜찮지만 브루스에게 보이는 코너의 공격성은 여전히 변수니까요."
딕은 머뭇거림이 느껴지는 손을 붙잡고 괜스레 털었다. 내일부턴 진짜 저 쪽에만 신경쓸테니까, 오늘은 좀 봐줘요. 기왕 왔잖아요. 그리고 브루스, 날 말리려고 들었다간 패트롤이 더 늦어질걸요. 씩 웃은 딕이 쌩하니 달려갔다. 이 분이에요! 외치는 목소리를 듣는 브루스의 표정이 복잡했다.
8.
[HALL OF JUSTICE_02
August 1, 12:46 EDT]
"히약!"
괴상한 기합을 지르며 요란하게 쓰러진 월리가 신음했다. 빛보다 빠른 스피드스터의 뒷목을 멋지게 잡아채 엎어치는 데 성공한 코너가 씩 웃었다. 내미는 손을 잡고 일어서며 월리는 아픔과 함께 새삼스러운 감회에 젖었다. 초반에는 정말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 져주고 그랬는데, 지금은 막상막하였다. 붉은 태양의 영향력이 사라진 코너의 힘은 이 곳에 온 첫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해졌으나, 여태까지 뭔가를 부수거나 망가뜨린 적은 손에 꼽았다. 여전히 다혈질이었고 분노의 끓는점도 낮았으나 예전처럼 죽자고 덤벼들거나 작정하고 싸움을 거는 일은 없어졌다. 고압적인 분위기나 자신만이 옳다고 여기는 버릇도 거의 사라졌다. 뭐, 칼더가 조목조목 잘못한 점을 짚어줄 때면 '내가 옳지만 참는다'같은 표정을 짓긴 하지만 말이다. 뻐근한 다리를 쭉쭉 펴며 월리가 장난스레 말했다.
"야, 이제 진짜 힘으로는 못 이기겠다."
"슈퍼맨이니까."
"그래그래, 스피드는 내가 항상 더 빠르다는 걸 잊지 말고."
"동의할 수 없지만, '그래그래.'"
우우, 야유와 함께 기지개를 힘껏 편 월리는 개운한 마음으로 두 번째 아침을 차려먹으러 발을 옮겼다. 샤워는 나중에 하지 뭐~ 배부터 채워야지요~ 흥얼거리는데 코너가 어깨를 잡아왔다.
"왜?"
"...월리."
"또 뭔 일이야...? 야, 니가 이럴 때마다 나 불안해. 뭐든 빨리 말해봐."
"달이 바뀌었어."
응? 어벙한 소리를 내는 월리 앞에 코너가 달력 화면을 띄워보였다. 년도, 날씨, 요일, 날짜가 한 눈에 들어왔다. 8월 1일이라는 글자와 코너를 번갈아보던 월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게 뭐?"
"...이제 내 힘은 거의 완전해졌다고 생각해."
월리는 골똘히 생각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코너는 이제 자동차 무게는 거뜬히 들어올렸고, 버스 만한 무게도 집중을 끌어올리면 버텨낼 수 있었다. 카나리의 테스트를 통해 점프력, 근력, 지구력, 체력... 모든 신체 조건이 인간의 수준을 월등히 뛰어넘었다는 것도 판명되었다. 물론 눈에서 레이저를 뽑는다거나 팔을 쭉 펴고 날아다니는 건 못하지만 그건 원래 코너도 못했다. 간단히 말해 코너는 이제 완벽한 하프 크립토니안의 스테이터스를 회복한 것이다.
"그렇지? 근데 힘은 돌아왔어도 기억은 온전하지 못하잖아. 나랑 애들이랑, 다른 팀 멤버가 기억나긴 해도 아직 실감이 안 난다며?"
"...그건 그래. 하지만 더 기다릴 수 없다고 생각...해."
"엥? 뭘?"
코너의 얼굴이 전에 없이 진지했다. 그러면서도 혼란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월리는 감정에 아주 섬세한 편이 아니었다. 칼더나 로빈이라면 모를까. 하지만 둘은 지금 각자의 일로 자리를 비운 상태다. 그래봐야 십 분이면 돌아오겠지만... 시계를 흘끔거리는 월리에게 코너가 느리게, 하지만 힘주어 말했다.
"배트맨과 ...싸우는 것."
월리의 손에서 오렌지가 툭 떨어졌다. 데굴데굴 굴러간 과일에는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다. 어, 어어...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월리에게 코너가 간절함마저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이길 자신이 있다는 건 아니야. 그를 마주한 그 순간도 그랬어. 이상하게 몸이 굳고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지. 훈련하는 동안에도 그와 맞서는 생각을 해봤어. 하지만 그때마다... 자신이 없어져."
"어... 그건 좀 당연한듯... 나도 배트맨이랑 싸우라고하면 일단 튀고 볼 거 같... 아, 아니 이게 아니라,"
"하지만."
코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월리는 이 와중에도 코너가 제 팔을 부러뜨리지 않을 정도로는 힘조절을 해내고 있다는 것에 감격했다. 아주 안 아픈 건 아니었기 때문에 몸을 슬쩍 진동시켜서 느슨하게 만들었지만 말이다. 코너는 어딘가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배트맨과 맞서야해. 그를 찾아내서, 결판을 지어야해."
"어...으... 그... 꼭 오늘 해야할까...? 목요일은 어중간한 날인데..."
"부탁이야 월리."
헐. 월리의 입이 쩍 벌어졌다. 입 안에 아무것도 없는 게 다행이었다. 얼빠진 얼굴을 한 친구에게 코너는 다시금 부탁했다. 나는 배트맨을 찾아야해. 찾아서, 내가 할 일을 해야해. 도와줘. 적발의 스피드스터는 으아악, 답답한 고함을 지르며 머리를 쥐어뜯는다. 코너는 어쩐지 풀죽은 표정으로 소리없이 절규하는 월리를 바라봤다. 진짜, 칼더라면! 딕이라면! 아오! 열이 오르는 두피를 파바박 턴 월리가 몸이 반으로 접힐 만큼 큰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이 다크서클이 생긴 듯한 녹안이 코너를 향하더니 어깨를 콱 움켜쥔다.
"야, 내가 너 목숨 위험한 짓을 어떻게 도와 주냐. 배트맨한테 싸움 걸러 가겠다는데 보내주면 그게 친구냐고."
"난...!"
"하지만!!!"
월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코너에게 지른다기 보단 제 스스로 용기를 북돋는 행동에 가까웠다.
"...찾는 건 도와줄 수 있겠지."
"!"
"만나게 해준다는 거 아니야! 찾는 거야! 얼굴만 보고 오는 거라고! 보고, 아 난 아직 덤비면 안되겠구나 느끼고 오는거야! 알겠어?!"
"..."
"조건없어! 토달지마! 안 그럼 없던 일로 한다!?"
"아, 알았어."
"따라해! 잠입미션! 전투금지!"
"자... 잠입미션... 전투금지..."
"그리고 칼더랑 딕이 알기 전에 후다닥 와야해. 들키면 너만 혼나는 거 아니야."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코너를 째려본 월리가 한숨을 퓩퓩 내쉬었다.
[MOUNT JUSTICE
August 1, 12:59 EDT]
샤샥, 빠르게 기둥 뒤로 몸을 숨긴 월리는 미친듯이 손을 파닥이며 코너에게 눈치를 줬다. 제타튜브라는 것을 처음 본 충격보다 제타튜브가 그를 '슈퍼보이' 라고 인식한 것에 대한 불만이 더 큰 코너는 사그라드는 빛을 노려보곤 마지못해 발을 옮겼다.
사실 찾는 걸 도와준다고는 했지만 월리는 애초에 여기, 그들의 원래 본부 외에는 갈 생각이 없었다. 괜히 이곳저곳 갔다가 제타튜브 인식 시스템에 남은 기록으로 덜미를 잡히는 것도 싫었고, 어차피 들킨다면 한 번만 혼나는 게 나을 거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정의의 산이라면 변명거리도 생각해낼 수 있었다. 뭘 놔두고 와서요. 슈퍼보이가 기억을 되살리는데 좋을 거 같아서요. 진짜 잠깐 보고 온거예요. 그리고 원래 우리 본부거든요? 머릿속으로 변명을 연습한 월리는 입을 벙긋거리며 코너에게 지시했다.
'내 뒤만 따라와야해.'
"여기 배트맨이 있..."
'쉬쉬쉬쉬쉬쉬쉿!쉬이이이잇!!!쉿!쉿!쉿!'
"..."
'배트맨은! 음소거도! 알아차린다고!'
제 목소리보다 조용히 하라는 월리의 손짓발짓이 더 시끄러웠지만, 코너는 눈썹을 찡그릴 뿐 순순히 입을 닫았다. 월리는 발끝에 힘을 바짝 넣고 살금살금 걸어갔다. 한동안 오지 않았지만 눈 감고도 찾을 수 있는 기지였다. 처음엔 긴장한 기색으로 월리를 따르던 코너는 내내 이어지는 조용함에 점점 짜증이 솟구치는 모양이었다.
'아무도 없잖아.'
'배트맨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나타나는 게 특기라구.'
속닥이면서도 월리는 속으로 안도했다. 여기 배트맨이 있을 거란 기대를 하지 않은 게 맞아떨어진 모양이었다. 천만다행이었다. 이대로 돌아가서, 칼더랑 딕에게 설득하는 걸 떠넘기기만 하면 발등의 불은 끌 수 있었다. 나머진 블랙 카나리가 설득해주지 않을까. 약간 자신감이 붙은 종종걸음을 치며 월리는 코너를 이끌고 제타튜브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배트맨, 0, 2
척추를 따라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피가 싹 식는다는 뜻이 이런거였구나. 심장이 튀어나올 거 같아 필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사색이 된 월리와 달리 코너의 눈이 번쩍 뜨였다. 한동안 잠잠했던 열기가 하프 크립토니안의 몸을 휩쓸었다. 주먹을 그러쥐는 힘이 어찌나 강했는지 살갗끼리 서로 마찰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날 정도였다. 심장이 두근, 두근, 뛰었다. 평소보다 빠르게, 평소보다 훨씬 가파르게.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에 몸이 아플 정도였다. 바로 뛰쳐나가자. 저 얼굴을 마주 하고 해야 했던 일을 끝내자. 달려나가는 대신 코너가 비틀거렸다. 넘어질 뻔 하는 몸을 월리가 황급히 붙들었다. 코너는 힘이 풀린 다리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왜? 혼란스러웠다. 두려운 건가? 아니야. 나는... 화가 나. 왜냐면... 그는 빌런이니까. 내가 쓰러뜨려야할 적이니까. 그리고 기뻐. 드디어 배트맨을 만날 수 있어서... 왜 화가 나고, 기쁘면서, 두렵지? 떨리는 코너의 눈이 홱 뜨인 건 다음 순간이었다.
슈퍼맨, 0, 1
으아아아아아아... 월리는 패닉했다. 왜 하필! 스스로 친화력이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월리였지만 슈퍼맨은 예외였다. 그는 좀... 어렵다. 무서운 건 아니고, 사람도 좋아보이고, 마땅히 존경하는 히어로인데도 그만큼 어려웠다. 근데 그가 배트맨이랑 함께??? 나 배트맨한테 혼나고 슈퍼맨한테도 혼나야 해? 위안 삼을 만한 일이 있다면(없었지만) 코너가 예전보다 슈퍼맨과 돈독해진 관계라는 것인...
아. 월리는 진심으로 x된 기분을 느꼈다. 옆에서 바닥에 손가락을 박아넣을 정도로 분노하고 있는 코너를 보니 더 그랬다. 아 이건, 망했다. 진짜로.
"브루스!"
"어쩐 일이지 클락."
"미안, 급하게 네가 필요한 일이 생겨서 데리러 왔어."
"통신으로 하지 그랬나."
"마침 제타튜브 근처기도 했고. 요즘 바빠서 얼굴도 못 봤으니 같이 갈까 싶었지."
"엄살은. 틈만 나면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졌으면서 뭘 그래."
"에이 브루스... 누누히 말하지만 능력으로 보는 것과 직접 얼굴을 보는 건 전혀 달라."
"그 말은 여전히 함부로 내 쪽을 관찰한다는거로군."
"엇..."
아, 아니... 정말 잠깐씩 그런거야. 오해하지마. 그것보다 자네 늦을 거 같은데! '우리'가 늦는 거겠지, 클락.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대화가 점점 멀어졌다. 인식, 슈퍼맨, 0, 1, 배트맨, 0, 2... 영원같던 순간이 지나고 이내 처음처럼 조용해졌다. 월리가 내내 참고 있던 숨을 뱉으며 털썩 주저앉았다. 일주일 치 칼로리를 전부 다 써버린 것처럼 탈력감이 몰려왔다.
"와 미친... 진짜, 진짜 운 좋았다. 백 년치 운 다 썼어. 배트맨에 슈퍼맨까지 있는데 안 들키다니... 우씨, 내가 다신 너 데리고 나오나 봐라! 이러니까 말린 거... 잖..."
"...큭..."
"코, 코너?"
월리가 본능적으로 물러났다. 코너가 짚고 있는 바닥에 균열이 갔다. 바닥재를 모래알처럼 부수며 움켜쥐는 손가락이 흉흉했다.
1.5
[MOUNT JUSTICE
August 1, 13:09 EDT]
쿵!
"거기 다시 비켜!"
"딕, 옆을 맡아! 최대한 틈을 파고들어서 움직임을 봉쇄... 조심해!"
"월리 피해!"
"끄악!"
"코너!!!"
"악! 쫌! 친구가 말 하는데 벽 던지는 거 아니라고 했지!"
9.
[MOUNT JUSTICE
August 1, 13:12 EDT]
"잡았다! 내가 잡았어! 여기 아무거나 붙들어놓을 것 조오오오아아아악!!!"
"내 몸에서 손 떼!!!"
코끼리처럼 몸을 뒤트는 코너 탓에 월리가 형편없이 휘둘렸다. 종잇장처럼 펄럭이면서도 떨어지지 않는 것에 분노의 포효를 내지르더니 벽으로 돌진한다. 월리가 붙잡은 등을 가차없이 내려치는 것에 칼더가 황급히 물줄기를 뻗었다. 휘청이는 틈을 타 후다닥 떨어진 월리를 확인하고 전극을 흘려보냈지만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괴로운 음색을 쥐어짜면서도 공중으로 뛰어오른 코너가 천장에 냅다 주먹을 날렸다. 공간이 우르릉 흔들렸다. 딕이 이를 악물고 외쳤다.
"그러다 무너지겠어! 코너!!!"
"내가 어떻게든 막을테니 너희 둘은 빠져나가!"
"그럴 거 같냐!"
악을 쓰는 월리 옆으로 천장 잔해가 후두둑 떨어졌다. 눈을 질끈 감은 월리의 주변으로 스피드포스가 튀었다. 천장으로 달려 코너를 다시 붙잡을 심산이다. 그때였다.
"큭?!"
그래플링 건이 코너의 발목을 휘감았다. 당황해 멈춘 틈을 놓치지 않고 바닥으로 끌어내린다. 이를 드러낸 코너가 줄을 끊으려는 듯 잡아챘다. 얼굴이 가까워진 순간 갈고리에 장착된 사출구에서 마비 가스가 뿜어져나왔다. 거센 재채기에 몸을 가누지 못한 코너가 점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쿨럭, 쿨럭. 연신 터지는 기침에 벌겋게 핏발이 선 눈을 집요하게 떴지만 그게 전부였다. 천천히 걸어나온 배트맨은 코너 쪽으로 발을 옮겼다. 바닥을 짚은 손이 뻗어나왔지만 닿지 않는 거리에서 멈춘 탓에 허공을 움켜쥘 뿐이다. 딕이 급히 배트맨에게 갔다.
"배트맨...!"
"다가오지 말거라. "
엄격한 목소리는 화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옆구리를 움켜쥔 월리가 얼떨떨하게 물었다.
"어떻게...? 언제...?"
"바이오쉽 진입로, 방금. 이제 질문은 그만. 즉시 홀 오브 저스티스로 돌아가 마샨의 지시를 따라라."
"저..."
"변명은 나중에 듣겠다."
월리는 두말않고 제타튜브로 향했다. 가기 전에 걱정과 미안함이 섞인 눈을 코너에게 향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칼더가 딕의 어깨에 손을 올렸지만 딕은 돌아보지 않았다. 배트맨이 다시 말했다.
"로빈."
"싫어요."
고개를 돌린 배트맨이 예의 그 '눈빛'을 보낸다. 로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칼더가 채근하듯 팔을 당겼지만 미동조차 없었다. 배트맨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괜찮다."
"하지만...!"
"코너를 믿고, 나를 믿으렴. 네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거다."
입술을 질끈 깨문 딕이 마지못해 돌아섰다. 제타튜브의 가동음이 멎었다. 둘만 남은 공간에는 분노로 점철된 슈퍼보이의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배트맨은 그래플링 건을 거두어들였다. 마비 가스는 인간에게나 겨우 들을 강도였기에, 밭은 기침을 몇 번 뱉은 코너는 이내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배트맨이 자세를 낮추었다. 무릎을 접고, 바닥에 웅크린 코너와 같은 눈높이로 앉았다. 양 손은 망토 바깥으로, 어떤 무기도 태세도 갖추지 않고 늘어뜨린 채다. 브루스는 가만히, 아이를 불렀다.
"코너."
"당신...!"
비틀거리듯 달려나온 코너가 배트맨에게 달려들었다. 목 부분을 틀어쥔 악력이 거세다. 배트맨은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코너는 카울로 가려진 눈을 노려보며 격한 원망을 뱉어냈다.
"이제서야 나타나다니!!!"
"..."
"내가... 널 해치울거야. 그러면 편해지겠지. 월리, 딕, 칼더가 도와줬는데도, 이 감정만큼은 끝까지 가라앉지 않았어! 그건 전부 네 탓이야!!"
"..."
"넌... 네놈은 빌런이야. 확실해. 그렇지 않다면, 이, 감정을... 내 분노를! 설명할 수 없어! 넌 날 괴롭게하고, 화나게 만들고, 날... 나를... 거부한 빌런이야!"
고함이 멈칫했다. 혼란에 잠식되는 눈을 보며 배트맨은 제 숨을 조이는 손을 가만히 잡았다. 파드득, 감전된 것처럼 손을 떤 코너가 주춤주춤 물러났다. 이상한 기억이 거품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대련장... 저스티스 홀은 아니다. 정의의 산인가? 코너는 대련장을 빙빙 돌며 태세를 갖추고 있다. 그와 대련하는 사람은 친구가 아니다. 까만 망토가 나부끼더니, 코너는 영락없이 바닥에 등을 대고 만다. 일부러 이래요? 툴툴거리는 목소리는 화난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즐거워보였다. 아니... 즐거웠다.
"코너."
브루스의 목소리가 조금 갈라져있었다. 코너는 머리를 감싸쥐고 그를 바라봤다. 잔뜩 충혈된 푸른 눈이 안타깝고, 너무나 약해보였다. 브루스는 손을 뻗어 코너의 어깨를 잡았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손길에서 다시 기억이 터져나왔다. 코너, 너는... 낮고 차분한, 하지만 묘하게 망설이고 있는 목소리.
너는 지금 조금 혼란스러울 뿐이야. 브루스가 말했다. 코너가 반항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뇨! 그렇게 믿고 싶은거겠죠! 그래야 편하니까! 매서운 일갈에도 브루스는 다만 미안한 표정을 할 뿐이다. 너는 너무... 어리다구요? 말허리를 잘라먹는 목소리에서 숨길 수 없는 상처가 드러난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아이와 같다고, 브루스는 생각했다. 피부가 고스란히 벗겨진, 붉은 생채기같은 상처. 브루스는 코너의 눈을 피하지 않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눈을 피하는 것이 더 상처가 될 것을 알기에.
어리고, 아직 미숙하지만 그 무엇보다 가능성이 있는 존재지. 네가 '어른'을 동경하는 것은 안다. 그리고 네 주변에... 호감을 가질 만한 어른이 많다는 것도 사실이지. 히어로로서 모범을 보이고, 네가 장차 나아갈 발걸음에 도움을 얻는 건 좋은 일이야. 하지만...
브루스는 다시 한 번 고개를 가로저었다. 코너가 이를 갈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두 번의 거절을 마주할 용기없다는듯이. 청소년기에 느끼는 호감은 네가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란다. 너는 금방 벗어날 수 있을거야. 그리고 더 오래 감정을 주고받고 믿을 가치가 있는 새 만남을 찾을 거다. 지금은... 공허하게 들리겠지만, 지금 내게 향한 감정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더 좋은... 신발 끝만 하염없이 바라보던 코너가 돌연 움직였다. 말을 잇던 브루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인간이 따라갈 수 없는 반사신경이 그를 덮쳤다. 시야를 가득히 메우는 젖은 벽안에 브루스는 홧홧한 열기를 느낀다. 그리고 코너는...
"...날 밀쳐냈잖아요..."
"...미안하구나."
"나는... 그냥, 그냥... 화가 났고... 그냥..."
"...그래."
"당신이 날 자꾸 무시하니까... 나는, 기억을 잃어도... 당신만 보면 기뻤는데. 좋았고... 화가 날 정도로... 무서웠는데..."
"내 잘못이다."
"나는... 진짜 좋아하는 건데... 자꾸만..."
굳은살 하나 없는 손이 브루스의 손을 겹쳐 잡았다. 손바닥에 패인 손톱자국에 브루스는 얕은 한숨을 내쉰다. 배트맨의 손이 생채기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코너는 너무나 밉고 다정한 손을 움켜잡고 숨을 가다듬었다. 이 이상 어린애처럼 굴기는 싫었다.
"너는 날 좋아하지."
"..."
"그걸 무시하면 안 됐어. 그리고... 늦었지만, 날 좋아해주어서 정말 고맙구나."
"..."
"그리고..."
"으..."
"미안하구나."
으으... 잔뜩 일그러졌던 푸른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터져나왔다. 뺨을 타고, 코를 타고, 턱까지 줄줄 적시며 흐르는 눈물이 둘의 손을 담뿍 적셨다. 브루스는 딱딱한 손갑주를 벗었다. 맨손으로 젖은 얼굴을 감싸주자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흐어엉, 어허어엉. 제 나이에 어울리는 울음을 연신 터뜨리는 아이에게 브루스는 다정한 어른이 품을 법한 애정을 느낀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며 엉겨붙은 눈물을 쓸어주자 봄의 하늘같은 눈이 저를 쳐다봤다. 같은 마음이 될 순 없겠지만... 속으로 읊조리며 살며시 다가간다. 첫 번째 키스에 이어 두 번째 키스까지 밀쳐낸 것에 대한 사죄와 저 때문에 시킨 마음고생이 다신 되풀이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담으며 눈을 감았다. 휘둥그레 커진 코너의 시야가 검은 빛으로 가득 찼다. 눈물과 감정으로 뜨겁게 젖은 입술에 사늘한 감촉이 꿈결처럼 닿는다.
10.
[BATCAVE
August 2, 23:48 EDT]
"딕."
"..."
"나갈거면 준비하거라."
"..."
"안 나갈거면 저택으로 올라가. 숙제라도 미리 해두렴."
"..."
고집스레 돌아앉은 모습에 브루스가 흘끔 시선을 준다. 찰칵. 벨트를 고정하며 여상하게 물었다.
"아직 화났니?"
"당연한거 아녜요?!"
목뼈가 삐끗할 만큼 거세게 돌아앉은 딕이 빽 소리쳤다. 수트 차림이지만 아이마스크는 착용하지 않은 채다. 브루스는 별 반응 없이 마저 채비를 갖췄다. 카카캉, 의자째로 거칠게 밀고 온 딕이 바락바락 항의했다.
"걱정하는 일 없을 거 라면서요!"
"없었잖니."
"지금 그런 말이 나와요?!"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슈퍼보이의 정신 조작도 완전히 풀렸다. 너희 셋이 입은 상처와 영 저스티스 리그의 본부의 손상이 다 회복되는 대로 다시 임무에 돌입할 수 있다. 일을 정상궤도로 올려놨으니 너희 셋의 임무도 훌륭히 완수된 셈이지. 물론... 명령을 위반하고 멋대로 요주의인물을 이동시킨 벌은 받아야겠다만."
그래플링 건을 확인한 브루스가 딕을 내려다보며 슬쩍 윙크했다. 그 바람에 딕이 잠깐 버벅이는 사이, 자연스레 도미노를 들려주고 배트모빌로 걸어가는 뒷모습는 어이를 털기에 충분했다.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동료들을 볼 테니 잘됐구나."
"브루스!!!"
쏜살같이 달려간 딕은 매처럼 배트맨의 망토 자락을 콱 밟아버린다. 당돌한 행동에 브루스가 눈을 좁혔지만 입가는 부드럽다. 미묘하게 올라가 있는 모습에 딕이 더 펄펄 날뛰었다.
"그렇게 장담해놓고!!!"
"난 아직도 네가 왜 그리 화가 났는지 모르겠구나."
"코너한테 키스했잖아요!!!"
차원이 다른 고함에 박쥐들이 화들짝 날아올랐다. 파닥파닥 여린 날개소리에 브루스가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딕이 커다란 오해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적 없다. 그래서도 안 되고. 가벼운 뽀뽀가 전부였어."
"그게 그거죠!!!"
"네가 그 둘을 구별할 정도로는 컸다고 생각했는데."
아으으으, 답답해 죽는 신음이 절로 나왔다. 보아하니 브루스는 딕이 커다란 오해를 한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천만에! 오해를 하는 건 당신이라구요! 오해도 아니고! 이해를 못했다구요!!! 아직까지도!!! 분을 못이긴 딕이 자리에서 쾅쾅 굴렀다. 브루스는 이제 딕이 따라간다고 해도 말려야할까 고민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울릴 정도로 씩씩대는 사이로 태연한 목소리가 들렸다.
"뽀뽀는 너랑도 했잖니."
"아니 그건 다르죠! ...가족이잖아요!"
"그 비슷한 의미로 슈퍼보이에게도 한 거다. 친애와 축복이 담겨있다고 보면 되겠구나."
"비슷한??? 친애?! 축복?! 브루스!"
"네가 싫어하는 것도 이해한다."
딕의 귀가 쫑긋 트였다. 이제라도 고충을 알아준걸까? 거절하려면 확실히 해야했는데 정말 어마무지한 여지를 줘버린 실수를 깨달은걸까?
"다른 누구도 아닌 친구가 네 보호자에게 감정을 품었으니 어색할만도 하지. 나를 보면 어쩔 수 없이 생각이 날테고 말이다. 걱정말거라. 마음이 정리된 코너와 어울리다 보면 너도 모르게 잊혀질 거란다."
아아아악!!! 참다 못한 딕이 머리를 콱콱 헤집었다. 브루스가 혼내는 소리가 들렸지만 상관없었다. 청소년의 사랑에 대해선 브루스보다 딕이 백배, 아니 천 배는 더 잘 알고 있었다. 이게 깔끔하게 끝났다고 생각하는건 오로지 브루스뿐이었다. 인상을 찌푸린 브루스가 안되겠구나, 넌 남거라. 패트롤 돌 상태가 아니야. 라며 차 문을 열었다. 후다닥 올라탄 딕이 불만이 두껍게 붙은 얼굴로 도미노를 착용했다. 저를 미심쩍게 바라보는 얼굴을 한 대 때려주고 싶단 충동이 들었다. 지금 아무것도 모르는 게 누군데. 한숨을 푹푹푹 내쉰 딕이 등받이에 기댔다.
"일단 가요. 패트롤 돌면서 머리 좀 식힐래요."
"머리는 패트롤 돌기 전에 가라앉혀야 하는 거다 로빈."
"아 알겠으니ㄲ... ? 브루스, 정문에 누가 왔는데요?"
카울의 눈이 살짝 커졌다. 배트맨을 아는 자라면 연락도 없이 그의 패트롤 시간에 찾아올 리가 없었다. 빠르게 모니터를 확인한 딕이 악! 소리를 지르며 패드를 탁 덮어버린다.
"로빈? 다시 화면을 켜라. 누군지 확인을 해야..."
"아뇨! 아뇨! 필요없어요! 그냥 밀고 나가요. 우린 없는 거예요. 아무것도 못 본 거예요!"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니."
제 말 좀 들어줘요! 빽빽 소리를 지르며 패드를 뺏으려는 로빈을 노려본 브루스는 제 계기판에 손을 올렸다. 몇 번 조작하자 바로 화면이 떴다. 어둠이 깔린 웨인저 정문, 가로등만이 하얗게 빛나는 거기에 새파랗게 긴장한 얼굴의 아이가 서있었다. 브루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정문 앞에 선 코너는 초조하게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갑자기 꾸미고 오는 것도 이상한 거 같아서 늘 입던 티셔츠와 바지 차림이지만 적어도 깔끔하게 보이고 싶었다. 옷자락이 어디 구겨진 곳은 없나, 허리춤에 티셔츠가 빠져나오진 않았나. 워커 끈은 제대로 묶였겠지? 좀 더 깨끗한 신발을 신고 올 걸... 꽃다발을 쥔 손이 지나치게 축축하다 싶었는데 땀이 송골송골 배어 나오고 있었다. 주머니에 넣어온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는 손이 긴장으로 떨리고 있었다. 아직 싱싱한 장미꽃과 라넌큘러스의 향을 흡, 들이마셔봤지만 어째 더 어질어질해지는 것만 같다. 빈 손으로 뺨을 때린 코너가 눈을 부릅떴다. 다시 땀이 스미는 손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십니까. 차분하고 관록있는 목소리에 떠듬거리며 답했다.
"배, 배트맨한테 다, 다시 고, 고백하러! 왔습니다!"
모든 걸 다 듣고 보고 있는 브루스는 처음으로 그가 해야 할 행동을 찾지 못했다. 그러게 내가 그냥 가자고 했잖아요! 딕의 목소리가 어쩐지 멀게 느껴진다. 여지 주지 말랬잖아요! 이게 뭐야! 내가 미쳐요 진짜! 말을 잃은 박쥐 옆에서 울새만이 원망스럽게 목청을 높였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