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rweile Doch
알프레드 페니워스
X
브루스 웨인
by. 부양
주제: 데이트
호숫가는 봄내음를 가득 품은 물안개가 부유하여 공기에서마저 싹이 틈직하다. 오전 10시 경, 해가 저물지 않고서야 굳이 전등을 밝히지 않는 유리별장 안에는 흐릿한 녹음과 함께 촉촉하고도 달콤한 공기가 노곤하게 뒤섞이어 내려앉아있다. 유리별장 저편 트레일러에서 걸어 들어온 알프레드는 꼿꼿이 편 어깨며 소리 없이 단정한 걸음걸이에 자꾸만 엉겨 붙는 다디단 피로감을 하품 한 번 없이 견뎌내며 작게 푸, 푸 숨소리가 들려오는 이불뭉치 근처로 다가갔다. 킹사이즈 침대 옆 협탁에는 한 컵 분량의 물이 줄어든 물병과 곱게 엎어놓은 유리잔, 비지 않은 알약봉지가 있었고 주변에 굴러다니는 술병은 없었다. 약이든 위약이든 그런 것들이 필요 없는 밤이었던 모양이라고 알프레드는 속으로 몰래 안도해본다. 오늘은 브루스가 반드시 해야할만한 일정은 없으니 그냥 이대로 더 자게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알프레드는 조용히 걸음을 뒤로 물리려고 했다.
“으음.”
그때 부러 목과 비강을 울리는 소리가 나며 주인의 취향에 맞추어 살짝 무게감이 있는 흰 이불 아래 묻혀있는 커다란 덩어리가 꿈틀꿈틀 자리에서 몸질을 시작했다. 잠깐 동안 엎치락뒤치락하던 이불 뭉치에서 불쑥 바깥으로 뻗어져 나온 손이 더듬더듬 제 옆자리를 휘적거리다 꾸물꾸물 옆으로 움직여서는 알프레드의 옷깃을 설핏 잡는다.
“알프레드...”
“더 주무셔도 됩니다.”
웅얼웅얼 이불 속에 파묻어져서 더욱 불분명하게 들리는 발음으로 불린 제 이름에 알프레드는 보다 낮고 조용한 톤으로 답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알프레드의 옷깃을 가볍게 쥐고 있는 브루스는 이불 밖으로 피곤으로 가라앉은 눈동자를 쏙 드러냈다.
“알프레드.”
물기에 흐리게 녹아있는 담빛이 집사를 올려다보면 알프레드는 말씀을 하시라고 브루스를 기다린다.
“데이트 할 거예요.”
“그럴 예정이시죠.”
집사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프레드의 옷자락을 잡았던 손을 툭 떨어트리며 브루스는 성대하게 제 몸을 이불 속에서 뻗고 비틀어 기지개를 켰다. 하얀 이불이 들썩이는 모양새가 알프레드에게는 꼭 할로윈 때 유령으로 분장한 어린아이가 수선을 떠는 것처럼 보였다.
“봐 줄 거죠? 이번에도, 내 데이트.”
끙끙하니 앓는 소리까지 소란스레 내가며 온몸을 풀었더니 성에 찼는지 반짝하고 생기가 돌아온 눈이 장난기를 가득 담고서 알프레드를 바라보자 알프레드는 푹 과장스럽게 한숨을 쉬었다.
“옷을 챙겨두겠습니다. 우선 씻으십시오.”
“이번에는 안 씻겨줘요?”
이불을 꼭 끌어안고서 얼굴 반을 그 뭉치에 묻어놓은 채 앙증맞게 눈을 치뜬 브루스가 물으면 알프레드는 아무 말 없이 안경너머로 괜한 아양을 부리는 도련님을 덤덤하게 마주해주었다. 으쓱하니 어깨를 털고 브루스가 큰 몸을 흐느적흐느적 일으킨 다음 다리를 가볍게 한 번 바동거리자 알프레드는 그의 맨 발에 슬리퍼를 신기며 요망부리지 마시라 그의 종아리를 가볍게 찰싹 때렸다. 실내화가 곱게 신겨진 발로 곧게 서서 등 근육을 유연하게 움틀움틀 풀면서 걸어 나가는 브루스에게 참, 하고 알프레드가 덧붙였다.
“기본 화장품 외 오드콜로뉴나 향수, 왁스는 사용하지 마십시오.”
의아한지 브루스는 잠시 알프레드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했지만 알프레드가 다른 설명 없이 있자 이내 다시 제 갈 길을 간다. 어쨌든 오늘은 지금 순간에도 틱, 톡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머리카락이 아직은 전부 마르지 않아 물방울이 머금어진 브루스가 수건에 물기를 털어내며 목욕가운을 두른 채 바깥으로 나왔을 때 브루스에게 알프레드가 건네는 옷은 색이 진한 청바지에 검은색 브이넥 티셔츠와 단이 짧은 점퍼였다. 브루스가 이제 불혹의 나이를 훨씬 넘긴 것을 생각하면 꽤나 젊게 차리는 건 아닌가 싶은 것도 있었지만 과거에 있었던 ‘모의 데이트’ 내지 ‘데이트 예행연습’들 중 한 번 브루스가 자신을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좋다 제안했던 때 알프레드가 일주일 전부터 열과 성을 다해 맞추고 세팅한 차림을 떠올리니 이번에 그가 건네는 복장은 너무나도 캐주얼한데다 수수해서 브루스는 의아함을 버리지 못하고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정말 이거면 돼요?”
“그럼 동네 영화관에 가시면서 턱시도에 커머번드라도 착용하실 셈이십니까?”
“그건 아니지만...”
브루스는 묶어둔 제 목욕가운의 매듭을 만지작거리며 조금 못미덥다는 눈빛으로 옷을 바라본다.
“때와 장소에 맞추어서 제 나름 고른 옷입니다만 주인님 마음에 차지 않으시나 보군요.”
영 내키지 않는 모양새로 옷가지와 눈 씨름하던 브루스는 알프레드가 어딘지 모르게 서운한 기색을 내비치는 듯하자 서둘러 매듭을 풀고서 목욕가운을 벗어내며 곱게 놓아둔 옷을 하나하나 상처 진 몸 위로 걸쳤다. 그래도 여전히 찜찜함이 남은 브루스는 지나치게 꾸미지 않은 자신이 어색한지 제 몸을 빙 둘러보다 한 가지 추론을 입에 담는다. 어쩌면 젊은, 젊게 하고 다니는 이들을 전보다 자주 보고 함께 하다 보니 그들에게서 볼 수 있는 에너지가 알프레드의 마음에 들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차차 지쳐서 나이 들어가는 자신에 비해 서툴지만 새롭고 활기 넘치는 어린 히어로들을 보고 있자면 브루스부터가 조금은 더 힘내보자고, 잘 해나가 보자고 내심 그런 다짐을 하게 되었던 것도 있고 말이다.
“요즘... 취향이 바뀌었어요?”
반면 그저 기껏 일주일내리 공들여 머리에서 발끝까지 꾸며놓은 주인이 태양이 저 지구 반대편으로 넘어갔을 즈음이 되면 마법이 풀리는 신데렐라마냥 그 모든 것을 벗어내며 홀홀 박쥐가 되어버리는 광경을 전에 몇 번인가 보았더니 차림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라 깨달았을 뿐이라는 말을 능숙하게 삼키고 있는 알프레드는 큰 고민 없이 어깨만 한 번 으쓱했다. 마지막으로 알프레드는 브루스에게 도수 없이 테가 굵은 안경과 고담 팀을 응원하는 문구가 크게 프린팅 된 야구 모자를 건넸다. 이제 브루스는 인상을 숨기지 않고 아예 팍 쓰며 이것이 무엇이냐고 집사의 저의를 추궁하듯 노려본다.
“켄트 님께서 충분히 검증해주신 위장 아닙니까.”
뾰족하니 새치름하게 뜬 시선에 집사는 별로 개의치 않으며 대꾸했다. 그건 단순히 안경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아니라 사람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한 위장이라 말하고 싶어진 브루스지만 어쨌든 오늘 하루의 평가자는 알프레드이니 그의 충실한 피평가자로서 브루스는 그를 믿고 따를 수밖에는 없었다. 여전히 자기 얼굴에 이 촌스러운 안경을 걸쳐 쓴다는 것이 어딘가 자존심이 상했지만 말이다.(그러게 클락을 그렇게 놀리지 말 것을 그랬다.) 와중에 면바지에 티셔츠, 카디건 차림의 알프레드를 보면 무언가 같은 캐주얼 장르의 옷이라도 오라가 달라서 알프레드에게 노인네 같다고 비꼬는 말도 못 하는 브루스는 입술이 조금 튀어나왔다. 바깥을 나서면서 브루스 웨인을 돋보이던 인공적인 냄새도, 박쥐의 거죽도 두르지 않은 자신은 어색해서 브루스는 괜히 쥐고 있는 모자만 꾹꾹 괴롭혔다.
고담의 구도심을 벗어난 곳에 이제 모양이 갖추어지기 시작한 신도심은 유리별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웨인 사유지가 달리 대중교통의 왕래가 있는 곳도, 신도심이 도보로 갈만한 거리에 있는 곳도 아닌 만큼 브루스는 제 몇 대의 차들이 산삼마냥 묵혀져 있는 차고지에서 고급세단을 덮은 덮개를 거두어내려고 했지만 알프레드가 쯧쯧 하고 성대하게 혀를 차자 움직임을 뚝 멈추게 되었다. 그야 자본주의를 표방하는 미국인만큼 자신의 소득에 따라 비싼 차쯤이야 끌 수도 있지만 아직 인구 분배가 완전히 되지 않아 고즈넉한 동네 한 구석에 혼자 덩그러니 세워진 누구라도 보닛 위 심벌을 보면 비싼 차로구나 알 수 있는 자동차는 고담에서야 그 운명이 대충 정해졌기 때문이다. 거기다 브루스 웨인이 소유한 차의 거의 대부분은 언론인들의 정보망에 리스트로 정리 되어 있기도 하고 말이다. 두 사람은 알프레드가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때 이용하는 중저가 SUV에 타기로 했다.
“바퀴쯤이야 도난당해도 상관없지 않아요?”
자신이 알프레드에게 데이트를 권했던 것인 만큼 브루스는 제가 당연히 열쇠를 가져가려고 했지만 알프레드가 거절했다. 알프레드의 지시에 따라 조수석으로 자리를 잡은 브루스는 안전벨트를 매며 그렇게 치면 보통 차의 부품이라고 어디 못 쓰겠느냐며 가볍게 구시렁대면서도 어딘가 가라앉은 눈을 했다. 슬픔과 뿌리 깊은 분노, 그리움이 이것저것 엉겨서 안경알 너머로 보이는 브루스의 눈동자는 유독 빛이 짙었다. 별로 새삼스러운 상념도 아니다. 살아가는 한 살아남은 업으로서, 복으로서 짊어질 감정이기에 알프레드는 그런 브루스를 굳이 지적하지도, 달래지도 않으면서
“가는 길에 핫도그를 아침으로 먹기로 하죠.”
하고 말할 뿐이다.
“나 칠리소스 잔뜩 넣은 걸로요.”
브루스도 순순히 그의 말에 응했다. 스스로 운전하거나 아니면 뒷좌석에 덜렁이 앉는 일이 대부분인 브루스는 오랜만이 조수석에 앉으니(거기다 열 몇 살 이후 처음으로 알프레드 소유의 차를 타다보니) 조금 흥분을 한 듯했다. 웨인의 사유지에서 고담 본토와 이동하는 동안 창문을 완전히 열어 놓고 고개만 쭉 빼어 바깥을 둘러보던 브루스는 얼마 후 진정했나싶더니 이번에는 차의 음향기기에 관심을 가진다. 부품이야 차 주인의 손을 타서 이것저것 새 걸로 교체되었지만 모델 자체가 퍽 연식이 있는 알프레드의 차는 요즘 시대에도 카세트테이프를 재생할 수 있었다. 브루스는 라디오 채널을 여기저기 돌려보다가 알프레드가 가진 카세트테이프들을 죽 살피며 재잘댔다.
“퀸이요? 알프레드 퀸도 들어요?”
아무래도 제 주인은 집사의 재생 목록에서 바흐나 파가니니가 나오기를 기대했던 모양이다.
“라디오 헤드도 있습니다만.”
알프레드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휘익, 하고 브루스는 작게 휘파람마저 불었다.
그렇게 차를 달려 신도심으로 오니 시간은 11시 45분 즈음. 공영주차장에 차를 두고 가는 길에 핫도그나 토스트를 파는 가게에서 아침, 시간상으로는 점심을 해결한 뒤(알프레드가 브루스의 핫도그에 양배추와 피클 샐러드를 추가하자 야구 모자 아래에 브루스는 아무 말도 못 하면서 괜히 또 입술만 새끼오리마냥 삐죽였다.) 영화관으로 향했다. 일주일 전 알프레드에게 어떤 영화가 보고 싶으냐고 물었던 브루스는 그 영화가 상영 중이라는 관으로 곧장 올라가려 했지만 알프레드가 그의 뒷덜미를 잡아 무인발권기로 데려왔다. 시간과 상영관, 좌석, 성인 2인이 프린트 되어 나오는 종이를 브루스는 신기하게,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이번 데이트는 평범하게 하시는 것 아니셨습니까?”
알프레드가 푹 하니 한숨을 쉬었다. 저스티스 리그의 히어로들과 무어를 하냐는 둥, 어디가 좋냐는 둥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는 것 같더니 그로 얼마 지나지 않아 알프레드에게 “이번에는 평범하게 영화를 보러가는 거 어때요?” 하고 브루스가 이야기했던 것을 떠올렸다. 한 이십여 년 전에 무슨 기념일이 해마다 반복되는 것 마냥 이어지다 어느 사건, 어느 시점에서 뚝 소식이 끊겼던 ‘데이트’가 정말 오랜만이 제 도련님의 입 밖으로 나온 것은 내심 기꺼웠지만 알프레드에게 보고 싶은 영화를 들은 뒤 영화관 사이트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다짜고짜 그곳 운영자에게 전화를 하는 모습을 본 알프레드는 상영관을 통째로 빌린 뒤 신나서 작업대 쪽으로 브루스가 걸음을 돌리는 것을 확인하자 다시 전화를 넣어 브루스 웨인이 개인적 사정이 생겼으니(대충 차였지만 차마 집사 된 도리로서 그렇다 말은 할 수 없겠다는 뉘앙스로) 관의 예약을 취소해 달라 부탁했다. 위약금 얼마를 지불한 뒤(웨인 엔터프라이즈의 계열사였으나 CEO에게도 얄짤없는 것이 회사 인사가 정말로 잘 운영되는 모양이라고 알프레드는 지난 일들을 떠올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오늘로부터 4일 전 알프레드가 대신 영화표를 예매했다. 물론 브루스의 카드를 이용해서. 합쳐서 30달러가 안 되는 금액이었으니 빠져나간 내역이 브루스에게는 알림도 가지 않았을 테다.
“그래서 영화관 전체가 아니라 해당 시간의 상영관만 빌렸잖아요.”
쯧쯧, 집에서 홈시어터를 이용해서 영화를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겠냐고 말을 꺼내지 않은 게 기특하다면 기특한 일이었다. 고개를 가볍게 저으면서 알프레드는 브루스에게 캐러멜이 묻은 팝콘을 쥐어주었다. 브루스는 민망해서 모자의 챙으로 제 얼굴을 감추며 미리 한 손에 쥐고 있던 파인애플 소다를 쪼르륵 입에 물었다. 매표소와 매점이 있는 층의 벽면이나 코너에는 현재 상영 중인, 얼마 뒤 상영될 영화들의 팸플릿이 가지런히 전시되어있다. 그중에서 브루스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곧 알프레드와 보러 들어간 ‘그레이 고스트-최후에 웃은 이’를 뚫어져라 보았다.
“원하시면 한 장 집어 가시면 됩니다.”
“알아요, 나도 그쯤은.”
브루스는 어딘가 우쭐대듯 덧붙여 말했다.
“나는 이 영화 프리미어에도 참석했던 사람이라고요.”
그러고 보니 기자에게 다 됐으니 폭발 신이 멋있으면 좋겠다며 성의 없이 짧은 코멘트를 하던 브루스 웨인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 며칠 전부터 오랫동안 좋아하던 픽션 캐릭터의 영화를, 무려 프리미어로 볼 수 있다며 몰래 들떠있던 것 치곤 멋없는 반응이었다. 그의 귓바퀴가 설렘과 흥분으로 발갛게 된 걸 과연 몇 사람이나 알아봤을지 알프레드는 궁금했다.
“정말 이 영화면 괜찮아요? 이건 아마데우스나, 대부 같은 영화가 아니에요.”
상영관으로 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브루스가 불안한 듯 소곤소곤 말했다. 팝콘 잡은 손가락을 움찔하며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못 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눈을 반짝이고 있는 브루스를 샅샅이 훑어 본 알프레드는
“저도 액션쯤은 봅니다.”
하고 답해주었다.
영화는 영화사 특유의 화려한 연출과 액션이 두드러졌고, 이야기 내용은 평이했지만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면서도 요즘 시대 흐름도 반영되었으며 배우들의 연기가 출중했고 무엇보다 브루스는 어린 시절 그의 영웅이던 그레이 고스트가 해피엔딩을 맞이했다는 데 퍽 안심했다. 극장에서 나갈 때 다시 매표소 쪽으로 내려오게 된 알프레드는 브루스를 대신해서 그레이 고스트 팸플릿을 챙겼다. 자동차에서 폴더를 챙겨오는 알프레드를 의아하게 보았던 브루스는 깊이 감명 받은 얼굴로 알프레드가 건네는 폴더를 꼭 잡았다.
“이제껏 트렌트 배우가 하는 연기 외의 그레이 고스트는 상상해보지도 못 했는데 말이에요.”
관을 나온 브루스가 어딘가 먼 시선으로 중얼거렸다. 그레이 고스트는 그레이 고스트 하나뿐이라며 할로윈 코스튬도 함부로 입지 않았던 일곱 살의 아이가 문득 생각이 난 알프레드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도 웨인 주인님께는 트렌트의 그레이 고스트가 1번이시겠지만요.”
“어쩔 수 없어요. 그는 화신이었는걸요. 그래서 문제기도 했지만요.”
브루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가지고 들어갔던 팝콘은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몇 알 입에 넣었지만 브루스는 집중한 탓에, 알프레드는 이따금 스크린 빛에 흐릿하게 보이는 브루스 표정을 보느라(‘왜요?’ 브루스가 입술 모양으로 속닥였지만 알프레드는 별 말 없이 다시 고개를 원 위치한다.) 거의 그대로였다. 공영주차장과 극장 사이에는 작은 공원이 있었고 그 길목에는 푸드 트럭이 있었는데 피시 앤 칩스를 팔고 있었다. 트럭 앞에 세워진 간판을 보고 브루스는 짓궂은 아이마냥 얼굴이 환해지더니
“저거 먹을래요?”
라며 반은 장난삼아 반은 제 흥미로 이야기를 꺼냈다. 알프레드는 안경을 고쳐 쓴 다음 아무렇지 않게
“정말이십니까?”
하고 되물었다. 브루스는 고개를 열성적으로 끄덕이며 알프레드의 표정 변화에 주시했지만 눈썹이 한 번 휙 치솟은 것 외에 별 다른 것은 없었다. 알프레드가 먼저 성큼 걸음을 옮기면 꼭 여덟 살 난 아이마냥 쫄래쫄래 알프레드를 따라 걷는 브루스의 기척이 느껴진다.
“제가 원하는 대로 주문해도 괜찮으시겠죠?”
물론이죠, 하고 브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피시 앤 칩스, 머시 피스도 곁들여 주십시오.”
“잠깐—”
“7달러입니다.”
때는 늦었다. 가격을 이야기한 푸드 트럭 주인의 손에는 알프레드가 내민 현찰이 넘어가버렸다. 손을 머뭇머뭇 들어 올리고서 입술이 살짝 열린 채 뚝 멈춰버린 브루스에게로 알프레드는 슬며시 시선을 준 다음 비죽 웃으며
“저는 먹는다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하고 경쾌하게 잘라 말했다.
공원 벤치에 앉아서 알프레드는 달콤한 캐러멜이 입혀진 팝콘을 한 알 우아하게 집어먹었다. 무릎에 알프레드가 준비해준 손수건을 깐 뒤 종기용기를 놓고 그 위에 제법 단단한 재질의 종이 포크를 쥐고 있는 브루스의 표정은 아까 호기심에 반짝이던 것과 딴판으로 그저 불만이 가득 차있다. 살짝 얼굴이 시들어버린 것도 같다. 그래서 알프레드는 집사의 마음씀씀이는 눈곱만치도 알지 못 하는 것 같은 주인에게 굳이 친절하게 덧붙여주었다.
“식초 양념보단 단 것이 도련님 취향일 것 같아 골랐습니다만.”
“망한 음식을 무슨 밈처럼 퍼뜨리는 건 지양해야한다고 봐요.”
커피 하나 제대로 내리는 데 약 3년이 걸린 남자가 제법 단호하게 하는 말이다.
“정 싫으시면 콩을 늘 하시던 대로 구석으로 밀어 넣고 드시던가요.”
알프레드는 그렇게 말한 다음 아삭, 뽀얗게 부풀어 달콤 짭조름하게 소스가 코팅된 옥수수를 또 한 입 잇새로 야무지게 씹었다.
“냄새가 이미 뱄잖아요!”
“별로 냄새랄 것도 없잖습니까.”
“나 괴롭히면 즐거워요?”
“절 보고 피시 앤 칩스를 떠올리신 당신이 하실 말씀인가요?”
우우, 금방이라도 볼을 부풀리며 볼멘소리를 뱉을 것만 같던 브루스는 마치 유독 물질을 격리해내듯 포크의 끝을 살살 머시 피스를 한 구석에 치웠다. 이따가 저 으깨진 콩 뭉치는 꼭 다 먹게 할 작정이다.
“...정말 이거면 될까요?”
잘라낸 튀김 한 조각을 먹은 브루스는 작게 턱을 움직여 씹어 본 다음 알프레드에게도 한 조각 건네주면서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상대의 필요와 기호만 파악할 수 있다면 선물을 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려움을 모르는 브루스였지만 데이트처럼 단 둘이 시간을 보내는 것은 여전히 자신이 없었다. 물론 상대가 쇼핑을 가고 싶어 하든, 맛있는 식사를 원하든, 하룻밤의 잠자리를 요구하든 한다면 문제될 것은 없었지만 알프레드가 그것들을 브루스에게 제안할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할뿐더러(이것이야 말로 안정적인 0%의 가능성이 아닐까) 모의데이트의 발단이 되었던 알프레드의 “이러다 주인님 데이트마저 제가 통신기 너머에서 도와드려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 한 마디 가 생각나 대뜸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브루스는 역설적이지만 삶에 강렬하게 끌리어 왔으면서도 정작 그것을 꾸려나가는 것에는 영 재주가 없어서, 그리고 그가 다시 알프레드에게 데이트를 제안하기로 용기를 가진 것은 퍽 오랜만이었기에 약간의 도움을 얻고자 리그원들에게 불쑥 물었다.
“데이트라 하면 보통 뭘 하지?”
하고 말이다. 그런 브루스의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듯 나온 말에 사위가 조용해졌다. 분명 전에 잡담을 이런 식으로 시작했던 것 같았는데 싶었던 브루스는 갑자기 뚝 하고 온갖 말소리가 그친 게 이상해서 작업대에서 고개를 들었고 거기서 자신에게 몰린 시선들과 마주치자 조금 움찔하고 눈꼬리를 떨었다. 얼마의 막간 뒤, 리거들은 산발적으로 말꼬를 트기 시작했다. 특별한 기억이 남는 것이 좋은가라던가 어떤 이벤트를 원하는가 등 브루스의 요구사항부터 확인하는 질문으로 시작한 리거들은 그 어떤 대형 아쿠아리움도 흉내 내지 못할 해저의 아름다운 광경에 대해 설명하거나, 달에서 지구 너머로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은 어떠냐고 제법 규모가 큰 이벤트를 입에 하거나 온종일 박물관에서 신들의 숨결을 간접적으로나마 접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해보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아주 못 할 것들도 아니었지만 이전에 알프레드와 섬 하나를 통째로 빌려 때 이른 바캉스를 갔을 때나 알프레드가 좋아할 법한 뮤지컬이며 전시회를 내내 순회했을 때도 순간이야 즐거워했지만 결국은 크게 감흥이 없어 보이던 것이 떠올라 음 하고 짧게 선 대답만 했다. 그러다 조언을 구한 브루스 본인보다도 멋지다! 근사한데! 하면서 열정적으로 반응하던 배리가 조금 수줍게 말을 꺼냈다.
“난 둘이 같이 동네 어디라도 다니면서 이야기하고 맛있는 거 먹고 그러면 좋을 거 같아. 이제까지 누구랑 뭘 해본 적이 많이 없거든...”
히히 웃는 배리 옆에서 시스템을 점검하던 빅터가 아마 그가 보게 된 데이터 속에 있던 4월 8일 날짜의 정보를 떠올렸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여주었다.
“일이 아니면 잘 안 나가는 사람끼리라면 소소한 외출로도 충분히 환기가 될 거 같은데? 소중한 사람과 함께하며 관심을 쏟을 수 있는 시간만큼 좋은 것도 없잖아.”
“옳은 말이야.”
두 젊은이의 진지한 대답에 브루스 놀리기는 잠깐 뒤로 하기로 한 다이애나도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빅터와 다이애나의 눈에는 과거 누리지 못 한 것과 두고 온 것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났다. 이윽고 아서도 “시장통도 꽤 괜찮더군.”하고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고 클락이 “모든 일정을 짜는 게 부담스러우면 영화는 어때? 근처에서 주전부리도 하고, 영화를 다 본 다음 대화하기도 편하고.” 말해주었다.
안타깝게도 자신이 계획했던 모든 데이트는 알프레드에게 감명을 주지 못 했던 그 때 그 날을 경험했던 브루스는 오랜만이기도 하고 해서 이번만큼은 무려 그 배트맨이 주변 사람들의 말을 참고해서 외출을 시도했던 건데 막상 일이 끝나가고 나니 어딘가 싱겁고 허전한 것이다.
“데이트가 아니라 그냥 잠깐 놀러 나온 것 같아요.”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지 않습니까.”
“당신은 만족해요?”
브루스가 조심조심 알프레드를 살폈다. 알프레드는 아침에 자신을 붙잡아오던 귀여운 손놀림이나 조수석에 앉은 브루스의 실없는 이야기들, 스크린에서 반사된 빛으로 드러난 영상에 잔뜩 집중해있던 반짝이던 옆얼굴과 바깥에 나왔을 때의 들뜬 표정, 알프레드가 건넨 팸플릿을 받고 세상 다 가진 눈동자들 하나하나 떠올렸다. 별 것 아니지만 그들의 일상에 그리 많지 않은 작은 즐거움들, 소소함 이 모든 것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알프레드가 담백하게 답했다.
“지금까지는 만족합니다.”
그리고 알프레드는 몸을 살짝 틀어 브루스와 무릎을 마주했다.
“Verweile doch. du bist so schön.(머물러라, 순간아. 너는 참으로 아름답구나.)*”
긴 손가락이 브루스의 코끝을 닿을 듯 말 듯 두드리고 거두어졌다. 모자의 그늘 아래서 브루스는 콧방울부터 시작해서 뺨, 귓가, 그리고 브이넥 티셔츠 밖으로 무방비하게 드러나 버린 목까지 간질간질 열이 도는 것을 느꼈지만 이내 잔잔하게 말했다.
“악마에게 지옥으로 끌려갈 작정이에요?”
“그것도 나쁘지 않군요.”
알프레드는 심상하게 답한 뒤 다시 팝콘을 한 알 먹는다.
“당신도 다시 배우 일 하면 어때요?”
몇 조각의 튀김을 다 먹은 브루스는 얼마 뒤 알프레드가 분명 다 먹으라고 얘기할 완두콩 페이스트를 의미도 없이 뒤적이다 더더욱 으깨놓다 했다.
“언제 적 이야기를 하십니까.”
“뭐 어때요. 알프레드, 당신 그 또렷한 어조 하나면 금방 현역으로 데뷔할 수 있을 걸요?”
당신 연기하는 걸 보지 못 한 게 내 삶의 한이라고요. 브루스가 장난스럽게 말하면 알프레드는 과장되게 흠하고 코로 숨을 길게 내뺐다.
“저도 언제까지 집사 노릇만 하고 살 수는 없죠.”
“그럼요. 이제 취미를 즐기며 살 때도 됐잖아요. 그간 일이라면 질리게 했고요.”
둘 다 그저 가벼운 투로 이야기한다. 저쪽에서 평온한 봄바람이 괜스레 마음 없는 말에도 가슴을 설레게 하고는 지나갔다.
집으로 돌아오고 별일은 없었음에도 시간은 벌써 오후 4시가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브루스가 남긴 머시 피스를 봐주는 대신 알프레드는 그로부터 하얗고 빨간 달리아 한 다발을 받았다. 슬슬 저녁을 준비해야지 싶어 알프레드가 부엌으로 향하면 돌아오는 차 안에서부터 벗어던진 모자와 안경을 어딘가에 두고 온 브루스가 뒤를 좇아온다.
“설마 요리를 하실 생각이십니까?”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고서 제게로 따라붙은 브루스를 보는 알프레드는 매정해보일 정도로 온기가 없었다. 설마, 감히 그럴 작정이시겠냐며 저를 불신과 못미더움으로 바라보는 알프레드의 얼굴이 어찌나 야속하던지 브루스는 그의 옷자락이라도 붙잡아야하는가 싶어진다. 브루스는 뾰로통하니 대꾸했다.
“그런데요.”
브루스는 알프레드의 냉장고에 ‘조금만’ 손을 가하면 먹을 수 있도록 준비된 식재료들이 그날그날 보관되어 있는 것을 알았고 그가 십대 후반 때 어느 정글에서 혼자 살아남았던 기억을 떠올리면 안전성을 충분히 검증받은 먹잇감이 이미 죽어, 잘 손질된 채 얌전히 냉장고 속에 잠들어 있는 부엌이야 두려울 것도 위험한 것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고서 저녁을 대접하지는 못 할망정 오늘 같은 날 알프레드의 손으로 식탁을 꾸리게 하는 건 너무나 멋없는 짓이라고 그쯤은 브루스도 알고 있었다. 다만 브루스가 머리에 넣지 않은 것이 있다면 브루스가 고담을 자신의 영역으로 여기고 그 어떤 좋은 의도를 가지고서라도 제 도시를 침범한 선량한 히어로들에게 쉬이 너그럽지 못 하는 것처럼 이 부엌-브루스 웨인을 먹이고,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이 공간은 알프레드의 영역이며 야생의 위험이야 없을지언정 ‘브루스 웨인’이야 말로 요주의 요소라는 것이다.
알프레드는 예전에 아버지의 날이랍시고 고마움을 담아 팬케이크를 만들겠다 소란을 떨었던 이 골칫덩이 주인의 만행을 언제고 잊지 않았다. 요리에 자신이 없다면 대강 ‘먹을 만하게’를 목표로 삼던가 할 것이지 이십여 년 간을 배트맨씩이나 해온 브루스는 안타깝게도 노력의 가치를 너무나도 맹신하고 있는 것이다. 기어코 알프레드에게 ‘완벽한’ 팬케이크를 대접하겠다며 온 부엌을 휘젓고 다닌 브루스는 재료들을 적당히 배합하여 잘 구워내기만 하면 될 것을(그나마라도 하면 좋을 것을) 어디서 보았는지 수플레 팬케이크니 뭐니 수선을 떨어댔다. 거품기에 파괴된 생크림이나 머랭이 여기저기 혼비백산하여 날아다니고, 가장 작은 불에서 서서히 숯이 되어버린 팬케이크 때문에 프라이팬 하나가 명을 다했으며 찾아본 레시피가 각각 조금씩 달랐더라고 어떤 것이 나을지 몰라 온 그릇마다 SUB.1, SUB.2 하며 라벨을 붙인 반죽들이 부엌에 가득했다.(그나마도 자신이 엄선해서 줄인 거라고 했다.) 거기다 굽는 중에도 모양이 어떻고 두께가 어떻고 하면서 난리법석을 떨어댄 데다 더 문제는 이 짓거리를 패트롤을 끝내고 돌아온 오전 5시경부터 오전 9시까지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 소동을 거쳐 알프레드에게 줄 것과 자신의 몫을 플레이팅 한 다음 한 입 입에 먹어본 다음 브루스가 한 말은 “이게 아닌데...”였으니 알프레드가 그 골 아픈 광경을 잊으려야 잊을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우리 아직 데이트 중이잖아요!”
알프레드가 금방이라도 제 등을 떠밀 것 같은 기색이자 브루스는 절박하게 외치며 한 발짝 더 부엌 안으로 들어왔다. 어떻게든 이곳에 버티겠노라 마음을 잡은 모양이다. 그런 브루스에게 알프레드는 콧등에 걸쳐진 안경 프레임을 정돈하며 서늘히 얘기했다.
“‘우리’가 아닙니다, 웨인 주인님. 훗날 주인님께서 데이트하는 법도 모르시고 엉뚱한 짓이나 하실까 싶어 집사 된 몸으로 이 노인네가 참견을 하는 것뿐이죠. 예전에 주인님께서 제게 카드 하나 건네주시며 대화는 영상통화로 나눌 테니 하고 싶은 걸 하고 오라 말씀하셨던 거, 잊지는 않으셨겠죠?”
브루스가 배트맨을 시작한 지 3년째가 되어가던 즈음, 브루스의 목소리가 낮아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기술이 미비하여 배트맨은 변성기가 아닌 직접 목소리를 기괴하게 만들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성대를 부러 짓누르듯 이야기를 하는 것이 차츰 익숙해질 때 즈음에 브루스의 평상시 목소리가 영향을 받아버렸다. 그래서 20대 중반의 브루스 웨인의 목소리는 오히려 지금의 것보다도 높고 가볍다. 그렇게 브루스가 다시 한 번 연습을 했기 때문에.
“이러다 주인님 데이트마저 제가 통신기 너머에서 도와드려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브루스의 발성법을 보아주던 알프레드가 한숨 섞어 이야기했다.
“나 데이트 잘해요.”
“그런 데이트 말고 말입니다.”
“그럼 무슨 데이트가 또 있는데요.”
브루스가 괜히 삐딱하게 대꾸했지만 알프레드는 그것에 응하지도, 지금도 입 밖으로 나올 것 같은 말과 말들을 하지도 않고 그저 브루스의 옷매무시만 한 번 더 잡아주었다. 그리고 그 해부터 브루스는 알프레드의 생일만 되면 무슨 도전장이라도 건네는 것 마냥 제가 생각하기도 괜찮다 싶은 데이트 코스들을 알프레드와 함께 하게 된 것이다. 그의 울새가 그렇게 사라져버리기 전까지.
그렇게 있어왔던 몇 번의 데이트 중에서 가장 황당했던 것이 그것이었다.
“돈은 원하는 만큼 사용하세요. 알프레드가 가는 곳은 저도 화면을 통해 볼 거고 대화는 영상통화면 되잖아요?”
알프레드는 자기 머릿속에서 어이가 저만치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게 당신께 훗날 소중한 분이 생기셨을 때 그 분께 하고 싶은 일입니까?”
알프레드가 한껏 차가운 눈으로 브루스를 바라보면 브루스는 괜히 더 바쁜 척 작업대에 벌여놓은 기기 부품들을 만지작거렸다.
“나 바쁘잖아요.”
과거 브루스는 구차하게 대꾸했었다.
“한참 옛날 일이잖아요.”
삐쭉, 다시 입술만 뾰족하게 만드는 브루스지만 지었던 죄가 죄인지라 반박은 하지 못 했다. 잘못한 것을 알아도 개선의 의지가 없어서 더욱 할 말이 없달까. 그렇지만 자신을 이렇게까지 있던 과거를 모조리 내세워서는 기어코 내쫓아낼 듯한 알프레드가 브루스는 점점 더 섭섭해진다. 아까 전에는 자기를 그렇게 멋지게 꼬드겼으면서, 있어달라고 이야기 해주었으면서 말이다.
“웨인 주인님께서 부엌을 만지시면 멀쩡한 조리기구가 최소 하나쯤은 못 쓰게 되니 나가주시지요. 지금쯤 루시우스가 주인님께 결재가 필요한 내역들을 보냈을 테고요.”
이쯤에서 알프레드는 부드럽고 온화한 투로 브루스를 다독이며 허리춤을 가볍게 토닥여준다. 물론 오늘 하루 완전히 일정을 비워놓은 브루스이니 대부분이 대결로 처리될 테지만 일이야 하려고 하면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여전히 토라진 얼굴로 뚱하니 서 있다가 브루스가 바깥을 나갔다. 하지만 이내 돌아온 브루스는 손에 태블릿PC를 가지고서 부엌 한 구석에 자리를 틀었다. 알프레드는 너그럽게 그것을 넘겨주기로 했다.
채소를 씻어 두는 것까지는 함께 한 브루스가 그에게 온 메일을 확인하며 루시우스나 다른 임원들에게 전화를 돌리며 오늘 중요하게 결재할 사항이나 알아야 할 내용을 파악하는 동안 알프레드는 샐러드용 채소들을 체에 밭쳐두고 양송이스프를 만들기 위해 버섯과 양파를 썰었다. 향신료가 든 것을 좋아하는 브루스 취향에 맞추어서 스프에는 강황과 후추도 넉넉하게 넣기로 한다. 칼이 도마를 두드리며 식재료를 자르는 소리, 버터가 녹으며 그 기름 위에서 버섯과 양파가 볶이는 소리, 거기다 믹서기 속에 스프 재료가 갈리는 소리 등 온갖 소리와 소리가 부엌 안을 채우지만 그래도 브루스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요는 요리를 하겠다 보다도 알프레드와 같이 있겠다는 의도였던 듯하다. 사실 인지에 어떤 문제가 없는 다 큰 성인 남성이 혼자 부엌에서 어떤 난장을 부린다 한들 그것은 그가 알아서 대처하게 할 일이지 누가 그에게 하라 말라 실랑이를 벌일 것은 아닐 테다. 그런데도 알프레드가 굳이 브루스에게 찬 시선을 주면서까지 그를 부엌에서 내치게 되는 것은 알프레드가 브루스의 삶에서 자신을 쉬이 지워보지 못 하는 까닭이다. 언제쯤 이런 생활을 청산하실 겁니까, 언제면 제대로 삶을 사시겠습니까 라며 브루스를 들볶은 것 치고 알프레드조차도 지금의 삶 외의 삶을 알지 못 해서 제 도련님을 알프레드는 떠나보지를 않았다. 그랬다간 브루스가 엉망이 될 거라서, 무엇보다 알프레드가 그럴 용기를 가지지 못해서 그랬다. 절대 브루스에게는 말하지 않겠지만.
스프가 적당한 온도가 될 즈음 파인애플 즙에 마리네이드해 둔 고기를 웰던과 미디움레어로 구운 뒤 잠시 레스팅을 해두며 알프레드는 시저 샐러드를 만들기 위해 베이컨과 작게 자른 식빵을 구웠고 마침 일을 끝낸 브루스가 샐러드 볼에 물기가 빠진 채소들을 담았다. 상을 차리기 위해 접시들을 들고 나가니 잠깐 바깥으로 나갔던 브루스는 호숫가가 보이는 테이블에 상을 마련해두었던 것 같다. 깔끔하게 치워진 테이블에는 어디서 꺼냈는지 촛불이 켜져 있었고 알프레드는 성대하게 인상을 팍 찡그리고 말았다. 브루스는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식기를 가지런히 하고 자리에 앉을 즈음 알프레드가 저쪽 찬장에서 알프레드가 처음 브루스에게 가르쳐준 달달한 와인 한 병과 잔 두 개를 가져왔다. 알프레드를 바라보던 브루스는 잠깐 일렁이는 불꽃을 한 번 그리고 저 숲 너머에 있을 도시 방향을 한 번 본 다음 자리에 앉으려는 알프레드에게 의자를 빼주었다.
둘 사이에 식사는 별 소음 없이 이루어진다. 그릇과 포크가 맞닿는 소리가 아주 살짝 울리며 공을 들인 저작 운동으로 식재료들을 조용히 입 안에서 짓이기고 찢어내는 두 사람은 다른 말이 없었다. 그저 알프레드가 자신의 접시로 샐러드를 덜어갈 때면 브루스의 접시에도 한 입씩 채소를 얹어주는 것과 브루스가 알프레드의 컵에 물을 따르는 것, 직각으로 자리를 잡은 덕에 가끔씩 테이블 아래에서 닿는 발끝 정도가 두 사람이 나누는 모든 것이다.
알프레드는 힐끗 이제 다섯 시 이십분이 막 넘어가는 시계와 저 유리 바깥에서 자주빛으로 저물어 가는 하늘을 보았다. 어둑한 유리에는 우습게 일렁이는 불빛을 공유하며 한 자리에 식사를 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반사된다. 알프레드가 손을 뻗어 와인 병을 손가락 끝으로 작게 꽁꽁 두드렸다.
“드시겠습니까?”
알프레드가 잘 묵혀둔 와인을 가리키며 묻는다. 처음 술을 접하는 브루스의 입맛을 고려해서 특별히 단 것으로 준비했을 때 마련했던 라벨이니 브루스가 싫어하지 않을 것을 안다. 집사가 먼저 술을 권하는 일이 드물기에 브루스는 그저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브루스는 준비된 듯이 찡그려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밤에 나가야 해요. 그래도 당신이 트레일러로 돌아갈 때 에스코트는 할 수 있어요.”
“웨인 주인님.”
부러 농담 말을 섞어 이야기하는 브루스를 알프레드가 덤덤한 눈길로, 아니 조금 끈질길 눈빛으로 좇는다. 그 시선을 아는 브루스는 괜스레 빈 와인 잔의 줄기를 손가락 끝으로 만지작거리다 결국 조금 밀어내고 만다.
“미안해요, 알프레드. 운전을 해야 해요.”
알프레드는 어깨를 으쓱하며 깔끔하게 손을 물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둘 중 누구도 술을 마시지 않았다.
이제는 관광 가이드지에 도시의 명물로 마저 소개되는 두 번째의 달이 오늘이 어떤 날인지도 모르고 떠올랐고 누군가에게 전해 듣기를 그 풍경은 얄궂을 정도로 아름답다고 한다. 알프레드는 그 모습을 어느 모니터 너머의 것이 아닌 직접적으로 본 일은 단 한 번도 없다. 왜냐하면 집사에게는 이 동굴에서, 배트맨의 카울 너머로 그가 운전하는 배트모빌 너머로 끊임없이 그를 보조해야하기 때문이다. 알프레드는 좀 전에 마시지 않은 와인의 코르크를 따서 잔에 벌컥벌컥 따른 뒤 음미하고 뭐고도 없이 마치 값싼 맥주를 비워내듯 단숨에 잔을 비웠다.
“오늘 어땠어요?”
스피커 너머로 배트맨의 변조된 음성이 들린다. 배트맨 차림을 한 뒤 보통 이런 식의 일상 얘기를 안 하는 브루스가 괜히 한소리나 들으려고 말을 꺼내는 게 우스워서 알프레드는 픽하니 웃으며 꼴꼴꼴 와인을 다시 반 잔 따른다.
“뻔히 아시면서 물으십니까? 고담에 남자들은 다 나가 죽기라도 한 건지 용케 바람둥이씩이나 하고 계시더군요, 주인님.”
인류가 참으로 애석할 지경입니다, 알프레드가 말했다.
“평소엔 나보고 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이야기 했잖아요.”
말이나 못하면. 다시 픽 웃는다. 사실 뻔히 결과를 예측하면서 일을 벌인 것은 알프레드도 마찬가지이기는 했다.
“어쩌면...”
잠깐의 침묵 뒤에 목적지를 향해 배트모빌을 몰던 브루스가 조심스럽게 말을 늘인다.
“어쩌면, 언젠가는 당신과 저녁에 술을 마실 수 있을지 몰라요.”
와인 잔에 입술을 대던 알프레드가 눈을 껌뻑이고 있으면 통신기 너머에서 브루스가 황급히 언젠가, 언젠간요. 나도, 언제고 젊지는 않잖아요 하고 덧붙인다.
“지금도 젊은 편은 아니십니다만.”
“언제는 나보고 아직도 한참 잘 팔릴 거라면서요.”
브루스가 카울 뒤로 꾹 인상을 쓰는 모습을 알프레드는 쉽게 떠올린다. 브루스가 거울을 들여다보며 의기소침해 하는 모습이-주변에 에너지 넘치는 젊은이들이 늘고 나니 더 그런듯하다. 거기다 하필 동경하는 대상이 그 크립톤의 자손일 건 또 뭐란 말인가- 속상하고 이해가 가지 않아 했던 말을 잘도 끄집어낸다. 무엇보다 자긴 늙지 않을 거라고 말했던 것은 브루스였으면서 말이다. 갑자기 이 도련님에게 무슨 바람이 분 건지 영문을 알 수가 없다. 아직 바깥에서 들여온 봄바람이 가시지 않은 걸까 알프레드는 괜히 치미는 기대감에도 순순히 그러십니까 하고 받아들이지 못 하고 부정부터 해본다.
“맘에 없는 말로 늙은이를 놀리는 건 그만 두십시오.”
후후, 하고 배트맨이 웃었다. 재미없는 농담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진심이 통하지 않은 멋쩍음 때문일까. 여러 그럼직한 설명이 떠오르지만 알프레드는 그들 중 무엇도 크게 신경 쓰지 않으며 예정대로 와인 잔을 비웠다.
“생일 축하해요, 알프레드.”
짧게 감은 눈 뒤로 음성 변조기도 가리지 못 하는 온기가 전해진다. 지난 번 고담 지하도에 출현한 슬라임 크리쳐를 처치하다 장비며 차량 곳곳에 묻은 성분을 알 수 없는 잔여물들을 치우다 알프레드의 손목시계가 망가지는 일이 생겼다. 수리를 내보내야지 하고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가 아차 싶어 찾아보니 기본 프레임들이 못 쓰게 된지 오래였다. 아직도 알프레드가 다른 시계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 것을 본 브루스는 생일선물로 시계를 사왔고 지금 그것은 알프레드 손목에 매어 있다. 그 시계에서 나는 심장박동과도 같은 초 하나하나를 들으며 알프레드는 오늘도 무사히, 제 곁으로 돌아오십시오 따위의 바람을 떠올리지만 굳이 그것을 입 밖에 하지 않았다. 대신에 알프레드는 배트맨이 곧 잠입해 들어갈 건물을 스캔하며 그의 위험을 최소화해나갈 뿐이다.
“배트맨, 지하입니다.”
과연, 그도 어쩔 수 없는 박쥐의 한통속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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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발췌
달리아의 꽃말은 ‘감사, 당신의 사랑이 나를 행복하게 합니다’라고 하여 브루스가 알프레드에게 선물하는 꽃으로 정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