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By. Ru
장식1.png


0. 夜 

 사람 사는 여러 땅 가운데서도 가장 번성한 한 도시가 있더라. 이웃한 여러 토지 중 가장 부유한 이들이 너구리 떼처럼 모여 있는 이 도시는 밤에도 불 꺼질 일 없이 소란했으나, 제 아무리 빼어난 건물과 으리으리한 재물로 치장한들 타고난 흉이 가려질 리 없는 법.  오래 묵은 땅 아래로는 천지사방의 어둔 것 중에서도 가장 탁하고 습한 기운이 고여 있어 도시에는 각종 재해가 끊이질 않는 것이었다. 땅거죽 위에 들러붙은 인간들 또한 그 기운에 걸맞는 족속들이 대다수, 가진 이는 탐욕스러워 빼앗고 가지지 못한 이는 살기 위해 빼앗으니 도시의 몰골이 아귀마냥 흉측해져만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허나 만물이 반드시 변하듯 부패한 곳에도 이변은 일어나는 법. 기세가 등등하여 나랏님도 법도 두려워않던 이들에게 호환마마보다 무시무시한 징벌자가 나타났으니, 철모르는 미친 자의 일탈이라 생각했던 편복야행(蝙蝠夜行)이 해 지는 시간마다 이어지길 어느덧 한 해 두 해... 

 섣불리 구원이라 칭하기엔 심히 공포스럽지 않느냐던 여러 목소리도 지금은 으레 그랬던 것 마냥 어둡고 불온한 밤이면 그가 쏘아올리는 불빛을 찾게 되었다. 이처럼 원귀처럼 나타나 정의를 행하며 가장 어두운 거리를 돌아다니는 그를 방방곡곡 구석구석 입을 모아 배트맨이라 칭하더라.

 

1. 朝 

 고래등보다 넓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넓디 넓은 웨인 가의 영지 가장 깊숙한 곳에는 박쥐와 그의 아이들이 기거하는 저택이 하나 있다. 소리도 색도 고즈넉한 그 곳을 보며 사람들은 곧잘, 고담에서 가장 뿌리 깊은 명문가답게 고풍과 위엄이 넘쳐 흐른다고 말하곤 했다. 아닌게 아니라 그 곳은 정면을 올려다 보는 이에게 묵직한 고요가 지그시 쏟아져 내릴 듯 중후한 집이었다. 저 곳 처마에 내려앉는 까치조차 뒷발꿈치를 들고 있을 것이라며, 사람들은 저택과는 십 리만큼 떨어진 영지 대문을 지나다닐 때도 괜스레 발걸음을 빨리 하곤 했다. 그 '고풍과 위엄이 넘쳐 흐르는' 웨인저 큰마루에 성난 발걸음이 쿵쾅쿵쾅 내달리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아버지!!!"


 코가 높은 버선발로 한달음에 문턱을 넘은 데미안은 제 아비가 있는 방으로 들이닥치기 무섭게 고함을 빽 내질렀다. 그릇이 달그락거릴 듯 거센 사자후에도 아비, 브루스 웨인은 익숙한 눈을 한 번 깜빡일 뿐 태연하게 답을 했다.

"왜 그러니 데미안."

"페니워스를 해고하십시오!"

"해가 서쪽에서 뜨더라도 그럴 일은 없단다."


 한 치 어긋남없이 던지고 돌아오는 문답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동쪽 땅의 모든 그림자를 다스리는 존재, 밤을 찢은 호랑이, 전 수장이자 친부였던 라스 알 굴의 목을 직접 거두어들이고 그 자리를 차지한 탈리아 알 굴을 떠나 이 집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이후 데미안은 이와 같은 요구를 수도 없이 말하곤 했다. 처음 데미안이 제 식기를 벽에 던지며 집사를 해고하려 들었을 때가 어제처럼 생생했다. 그 땐 브루스도 참 미숙했기에, 그 소리에 맞서 진심으로 화를 내고 말았더랬다. 하지만 지금의 브루스는 데미안의 떼를 농담섞어 거절할 정도로 이 상황에 익숙해져있었다. 이는 데미안도 마찬가지였다. 식기를 던지지 말라고 혼을 내면 보란듯 집안에서 제일 큰 솥뚜껑을 화덕 째로 뜯어 던져버리던 아이였다. 하지만 지금은 브루스의 실없는 말에 몹시 약이 오른 듯 씩씩거릴 뿐, 열어젖힌 문짝에 해코지를 할 기미는 없다. 옅은 잿빛 도포 자락을 단정히 끌어모은 브루스가 제 앞을 차분히 두드렸다. 아까보다는 소리가 덜한 쿵쿵 발걸음으로 다가온 데미안이 풀썩 주저앉는다. 하얀 속고의 차림 다리를 야무지게 모으고 꼿꼿이 허리를 폈다. 브루스가 다시 물었다.


"그래서, 이번엔 왜 그러니."

"페니워스가 입으라고 준 걸 좀 보세요!"


 똘똘 뭉쳐 쥔 주먹이 불쑥 내밀어졌다. 그 기세에 빳빳한 금(錦)이 바람처럼 펄럭인다. 봄날 새순처럼 선명한 연둣빛의 두루마기는 척봐도 최상품이었으나, 안타깝게도 미어져라 잡고 있는 소매 부분은 도깨비도 마다할 것같이 쭈글쭈글 일그러져있다. 주먹을 펴면 괜찮아질테지... 생각하며 브루스는 막내의 심중을 모른척 딴소리를 했다.


"네가 연녹빛을 좋아하니 공방에 따로 부탁한 천인데. 금실로 자수도 들어있고."

"그 부분을 말하는 게 아닙... 잠깐, 그럼 이 천쪼가리의 제작에 아버지의 음모가 들어간 게 사실이었어요?!"

"음모라니..."

"어떻게 나한테 이런 짓을 할 수 있어요!!!"

"그렇게나 마음에 안 드니?"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 흉측한 소매를 보고도 그런 말을 해요?!!"


 음, 거길 싫어할 거 같긴 했다만. 브루스는 데미안이 울분에 차 흔들어대는 비단 소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홍색, 청색, 황색, 백색, 자색, 벽색, 녹색... 무지개에서나 볼 법한 총천연색 색동 무늬가 가득 들어간 소매는 일반적인 시선에서야 특이할 것이 없었다. 당장 밖으로 나가 보아도 이처럼 색이 발랄한 오방장 두루마기를 입은 아이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굳이 흠을 잡자면 데미안의 두루마기에는 남들보다 색의 가짓수가 두어개쯤 더 많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만 그 추가적인 배색 또한 눈에 거슬리지 않고 조화로우니 결국 옷 자체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었다. 문제는...


"멍청하고 더러운 코흘리개나 입는 옷을 주다니!!!"

"데미안."

"싫어요!!!"

"그럼 뭘 입을 생각이니?"

"소여물을 입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이 따위 것은! 안 입을 거예요!!!"


 기세 좋게 바닥에 팽개치나 싶더니 소매를 꽉꽉 접어 제 쪽으로 힘껏 밀고선 팩 돌아앉는 것이 상당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잔뜩 팔짱을 껴 평소보다 솟은 어깨가 분을 못이겨 쒸익쒹 가라앉고 올라가길 반복한다. 브루스는 바닥에 구겨진 옷을 손가락에 걸고 허공에 들어올렸다. 창호지를 넘어 들어온 아침 햇빛에 촘촘히 들어간 금실자수가 반짝거린다. 구겨진 어깨선을 조심스레 눌러 펴며 브루스는 앵돌아 대꾸없을 막내아들을 불렀다.


"데미안."

"..."

"오방색의 의미를 알고 있니?"

"당연하죠!"

 날 뭘로 보는거냔 투로 튀어나온 대답은 의도한 게 아니었는지 살짝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화 풀린 거 아니거든요! 말소리가 들려올 것처럼 더욱 목에 힘을 준다. 한사코 벽을 노려보는 데미안을 향해 브루스가 조금 몸을 움직여 가까이 앉았다. 아닌 척해도 열심히 고개 뒤의 움직임을 쫓는 것이 보여 입 안쪽으로 웃음을 베어문다. 데미안의 곁눈에 잡힐 거리에서 반지르르 고운 소매를 펴보였다.

"동서남북과 중앙을 모두 아우르며 제각기 다른 가치를 지니는 것이 오방색이란다."

"..."

"이를테면 여기 청색, 동쪽과 봄의 색이며 만물의 탄생과 희(喜)를 뜻하지. 옷에 청색을 넣는 것은 해마다 새로이 소생하고 성장하는 이의 명예를 보이기 위함이란다."

"...그 쯤은 나도 알거든요."

 한껏 무뚝뚝하게 뱉은 목소리가 유독 앳되다. 브루스는 입안에 머금은 웃음이 툭 튀어나올 것만 같아 입술을 꾹 닫았다. 아닌 척 유유히 설명을 이어나간다.

"그럼 오방간색은 어떠니. 흑과 적은 북쪽과 남쪽, 물과, 불, 겨울과 여름으로..."

"-서로 상극이지만 둘 사이 정중앙에 자리한 균형점이 있으니 그것이 자색(紫色)이다."

"잘 아는구나."

"그래도, 이건 너무 과하잖아요."

"고작 열 개도 안 되는 색인데 너 답지 않은 말을 하는구나."

"저번에 잠ㅎ... 바깥에 나갔을 때 장도 다섯 자루를 한꺼번에 휘둘렀다며 반성문 쓰게 만들었잖아요! 과하면 모자란 것만 못하다면서요!!"

"당연하지, 절제는 중요하단다 데미안. 하지만..."


 과, 유, 불, 급. 지긋지긋한 한자 네 개를 꾸역꾸역 종이에 채워써야 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한 데미안이 왈칵 짜증을 냈다. 내 실력을 뭘로 보고, 검이라면 스무 자루든 서른 자루든 눈감고도 휘두를 수 있는데. 획 하나에 울분 한 번, 힘을 주어 꾹꾹 짓누른 붓이 싸리빗자루마냥 너덜너덜해질 즈음에야 겨우 한 장을 다 채울 수 있었다. 먹물이 지나치게 스며 너절해진 종이를 내미는 순간까지도 막내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었다. 반성은 했니? 엄하게 묻자 입을 삐죽이며 그런 셈이죠, 대답을 툭 던졌다. 반성문을 받는 브루스의 눈길이 단단히 매놓은 붕대에 가 닿았다. 검을 휘두르는 것에 심취하다 눈먼 날에 스치고만 상처. 다음에도 지금처럼 얕으리란 보장은 없다. 아버지의 시선을 느낀 데미안이 슬쩍 다리를 바꿔 짚는다. 짙은 눈썹은 여전히 불만스럽게 치켜올라가있지만 눈꼬리에 매달린 화는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부러 엄하게 힘을 준 브루스의 눈썹에서도 힘이 빠져나간다. 슬쩍 웃으며 반성문을 받는 손가락이 벼루에서 튀어오른 먹물로 까매진 손바닥을 다정하게 감싸쥐었다. 수고많았구나, 잘했다 데미안. 습관처럼 혀를 찬 아이는 으쓱으쓱 춤을 추려는 어깨를 들킬까봐 그대로 몸을 돌려 뛰어가버렸었다. 


 먹내음 밴 기억이 떠오르자 고집스레 벽을 보던 몸이 아주 조금 방향을 틀었다. 살짝 달라진 낌새를 모른척, 브루스는 엉덩이 아래 깔린 속적삼 끝을 슬며시 빼주며 말을 이었다. 

 

"...네가 지닌 가치는 무수하잖니."

"..."


 뒷목이 빨갛게 달아오른 것은 착각이 아닐테다. 브루스는 제 아들이 보지 못할 제 뒷목 또한 붉으리라 느꼈다. 아침 햇볕과 온도가 다른 홧홧함이 목덜미를 타고 심장께를 흐른다. 어색함을 숨기려 차분히 늘어지는 말투는 매끄럽다.


"고귀, 수호, 명예, 생동과 부활... 네게 어울리는 모든 가치들이 이 소매에 들어있는거지. 쉽게 말하자면 이 옷은 네 상징인거란다."

"...상징은 중요하죠."

"사람들은 상징을 통해 너를 보니까. "

"옷을 봐야지만 판단을 내릴 줄 알다니... 우민들이란."

"그런 뜻이 아니다."

"그들은 날 우러러봐야해요.  난 모든 걸 다 갖췄으니까."


 자신만만하게 돌아앉아 대답을 요구하는 똘망똘망한 눈동자에 어물쩍한 음, 소리로 답하며 브루스는 주름을 눌러 편 옷을 다시 건넸다. 습관처럼 입을 삐죽한 데미안이 옷을 받아 일어섰다. 먼저 바지에 다리를 넣고 쭉 끌어올렸다. 비단이 스치며 사각사각, 작은 소리를 낸다. 허리끈을 거침없이 묶고 새순빛 저고리의 고름도 꽉꽉 당겨맨 데미안이 문제의 두루마기에 팔을 꿰어넣는다.  지켜보던 브루스가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자연스럽게 허수아비처럼 양 팔을 뻗은 데미안의 목 뒤로 손을 돌려 감쌌다. 데미안의 턱께에 빳빳한 목깃이 닿을락말락 가까워졌다. 눈을 내리깐 데미안이 부쩍 가까워진 옷자락에 손가락을 대본다. 얇은 것이 겹겹이라 더 두텁게 된 질감이 전해져왔다. 제 옷에는 부귀니 명예니 건강이니하는 문양이 요란스레 가득인데 아버지의 것엔 농도 다른 잿빛만이 자리한다. 

 새로 풀을 먹인 동정 중앙을 잡고 소매부리를 당겨 화장 길이를 가늠한다. 금방 클테니 조금 낙낙하게 맞춰도 괜찮을 거란 말을 막고 몸에 꼭 맞게 맞추길 잘한 것 같다. 알면 화를 낼테니 대놓고 말할 리는 없겠지만, 적어도 올해까지는 데미안의 키가 불쑥 자랄 일은 없을거라 생각한다. 그도 그랬으니까. 어릴 때는 또래 중에 가장 작은 키여서 늘 한 두살 어린 취급을 받곤 했었다. 데미안이 그를 닮았다면 한동안은 작달마한 막내둥이로 남아있을 것이다. 혹, 제 어머니를 더 많이 닮았다면... 

 밤을 찢은 호랑이. 브루스는 그가 제 목을 밟고 예쁘게 굴어보라 명령했을 때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금테로 감싼 초록 구슬들이 탈리아의 신을 수놓고 있었다. 볼썽사납게 패한 박쥐는 시리게 빛나는 초승달 검에 입을 맞추었고, 제 상처의 핏물이 남지 않도록 입술로 날을 닦았다. 그 비리고 쓰라린 혈향. 바다를 가르고 다시 찾아온 탈리아와 그 옆에 선 소년을 보았을 때 브루스는 그 날이 피냄새가 뇌리를 적셔오는 것에 눈앞이 아찔했다. 가장 닮지 말아야할 얼굴을 한 아이. 데미안이 어머니의 비호가 아닌 제 날개 아래를 택했을 때 브루스는 안도와 공포를 동시에 느꼈다. 넌 옳은 선택을 한 거라고, 여기에서 넌 안전하다고 확신을 줄 수 없는 제 자신이 그토록 절망스러워울 수가 없었다. 그의 최선이 탈리아의 최악보다 모자랄까 두려웠다. 그 속내를 조롱하듯 도착한 서신에서는 탈리아가 침상에서 쓰는 향기가 가득 풍겨나왔었다. 우리 아들을 품기로 했다지. 어리석은 길을 택하고 후회하고야 마는 성정은 네게서 물러받은 모양이야. 네 실패를 기쁜 마음으로 거둘 날을 기다리겠어. 내겐 언제나 내 것을 품을 자리가 있으니... 브루스, 내 사랑, 언제나 무력하고 무력하여라.

 쫙 편 팔 아래 둥근 배래를 매만지는 손길이 느려진다. 아버지. 부르는 소리에 상념을 묻으며 고개를 든다. 누구의 것과도 같지 않은 상록의 홍채가 그를 똑바로 보고 있다. 도도록한 양 뺨은 그의 곁에서 해가 차고 달이 기우는 동안 얻은 것이다. 


"옷고름은 내가 맬래요."

"할 줄 아니?"

"...대충은요"


 인정하기 싫은 목소리에 자세를 고쳐 앉은 브루스가 제 도포 옷고름을 당겨 풀었다. 먹을 떨어뜨린 연적처럼 투명한 잿빛 천을 양 손에 쥐고서 따라해보렴, 말한다. 솔직히 고하자면 제 옷고름도 집사의 손이 들어간 터라 누구의 스승 노릇을 할 주제가 아니지만 아들의 눈동자가 제게 쏠린 이상 도로 물릴 수도 없는 법이다. 갑자기 흐늘흐늘한 뱀을 양 손에 쥔 느낌이 들어 식은땀이 살짝 솟는다. 애써 침착한 얼굴로 브루스는 길고 막연하게만 느껴지는 천을 신중하게 묶기 시작했다. 

 몇 분의 씨름 끝에 멀쩡한 옷고름을 매는데 성공한 부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거울처럼 똑닮은 옷고름은 서투른 손길에 시달리느라 살짝 꼬깃하지만, 방향도 길이도 모두 알맞다. 브루스는 지나치게 크게 만들어 술떡처럼 부풀어있는 데미안의 매듭이 신경쓰이고, 데미안은 워낙 여러번 실수한 탓에 매듭이 겹겹 엮여 풀어내기 고역일듯한 브루스의 것이 거슬리지만 말로 꺼내지 않는다. 중요한 건 둘이 직접 해냈다는 거니까.

 턱 밑에 갓끈을 묶은 브루스는 검은 복건을 눌러쓴 데미안을 내려다본다. 집안에서 가장 작고 늘 작을 것 같은 아이가 생각만큼은 작지 않다는 것에 조금 놀란다. 매일 봐서 이만큼 크는 줄 몰랐던걸까. 먼저 크고 자란 형들처럼 이 아이도 언젠가 불쑥 눈높이가 커지는 날이 오겠지. 지금도 담장이란 담장은 술술 넘어다니는 데미안이지만 그 때 되면 담장을 넘어오기도 전에 얼굴이 보일거란 생각을 하며, 브루스는 손을 뻗어 기우뚱한 복건을 살며시 벗겼다. 올려다보는 머리칼을 쓰다듬자 발돋움해오는 것이 몸 크기를 자랑하는 고양이같다. 손바닥에 동그란 정수리가 한껏 밀려들어온다. 볏처럼 솟은 앞머리는 넘겨주는 족족 다시 솟구친다. 정리해봐야 소용없는 것을 몇 번이고 더 넘겨준 다음 다시 복건을 씌워준다. 가운데 해태 문양은 몸을 지킬 안전과 길을 판가름할 지혜가 있길 바라며 넣은 것이다. 색이 담은 의미와 상징. 수호. 생동. 부활. 무슨 일이 있어도 안전하기를, 내내 건강하기를, 탈 없이 무사히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색동소매. 아이의 의복에는 그것을 입히는 부모의 마음이 한가득인 법. 오래 전부터 전해내려오는 색의 조합은 이것도 저것도 모두 챙기느라 과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리석고 약한 이의 걱정은 요란할 수밖에 없으니. 

 가요 아버지. 새 옷자락을 팡, 쳐보인 데미안이 먼저 뛰어나갔다. 빛을 받아 유난히 짙은 청록 양 옆으로 다양다색한 소매가 나풀거린다. 세상이 무슨 색을 던져와도 끄떡없을 법한 선명함이 날개짓한다. 끝도 없이 달려나가다가 대문 근처에서 멈춰 선다. 얼른 오라는듯 절 기다리는 눈빛을 향해 브루스는 걸음을 옮겼다. 아직 옅은 파랑 하늘을 배경으로 푸른 잎들이 흔들거렸다.

 

2. 午 


"브루스 이거 어때 보여요."

"난..."

"아니 됐어요, 햇빛에 보니까 영 별로네. 이건 빼요."

"저..."

"저건 됐다고요. 이거나 봐요. 메트로폴리스 산 무명이라는데 어때요?"

"아..."


 내 말 좀... 우물거리는 브루스는 나몰라라, 직물을 쫙 당겨 얼굴에 바짝 갖다댄 팀은 영 만족스럽지 못한 얼굴로 혀를 찼다. 쯧, 소리가 아침에 동문들과 수학하러 보낸 막내의 버릇과 닮아 있는 것이 조금 재밌었다. 셋째에겐 재밌는 일이 아니겠지만. 


"좋긴 한데 브루스랑 안 어울려요. 짜임이 너무 질기고 촘촘해."

"..."

"브루스!"

"으, 응?"

"듣고는 있어요?"

"물론 듣..."

"근데 왜 대답을 안해요?!"

"그..."


 ...거야 네가 말할 틈을 안 주니까... 입술이 다 벌어지기도 전에 팀은 성의없이 손짓하며 다시 고개를 돌려버렸다. 


"됐어요, 지금 바쁘니까 들어줄 시간 없어요. 이건 치우고. 스타 시티 쪽 물건 어디 뒀었죠?"


 마찬가지로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산처럼 쌓인 포목들을 손으로 짚어대는 팀을 보며 브루스는 마른 눈을 깜빡였다. 마부터 비단, 모에 이르기까지 만들 수 있는 모든 천들을 망라한 방 안은 실오라기와 먼지가 공기 중에 켜켜이 섞여 건조하다. 브루스는 아직도 이 상황이 썩 실감나지 않아 곤혹스럽다. 아침에 나선 지 몇 시진도 지나지 않아 셋째 도련님이 급히 찾는다는 전갈을 받았을 땐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크고 작은 우려들 중 부디 작은 우려에 해당되기를 바라며 돌아왔더니 대문 앞에 늘어선 수레들만 몇이던가. 빈 수레들은 일제히 대문을 빠져나가고 아직 짐이 들어차 그득한 수레는 비워지길 기다리며 늘어선 모습에 브루스는 드물게 얼이 빠져있었다.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웨인 씨. 변함없이 저희 가게를 애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소보다 다섯 배는 더 진심인듯한 웃음을 만면에 가득 띄운 주인이 손을 활짝 펴며 다가오는게 보였다. 수레 하나만큼 떨어진 곳에 서서 잔뜩 신이 난 목소리로 이야기를 건네 왔다. 오늘 하신 주문은, 하하! 솔직히 너무 갑작스러워서 물량을 모으는데 조금 바빴긴 합니다만 이처럼 성의를 표하시는데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웨인 댁 주문이라면 앞으로도 최우선으로 해드릴테니 맡겨만 주시고... 반사적으로 예의바른 미소를 띈 브루스는 자초지종을 묻기 위해 주인이 있는 쪽으로 다가가려 했으나 끊임없이 들락날락 바쁜 수레와 천이 그득할 목함들의 행렬에 가로막혀 나아갈 수가 없었다. 한 번 더 허리를 굽혀보이곤 싱글벙글 떠나는 포목상을 허망하게 바라보던 차에 소매가 앙칼지게 당겨진다 싶더니, 눈 밑에 그늘이 낀 제 셋째가 어딜 갔다 이제 오냐며 으르렁거리는 것이 아닌가. 뭐라 묻지도 답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침선방으로 끌려가 외투며 저고리가 냅다 벗겨지고 얇은 속곳 차림으로 앉혀진 지 어느덧 수 식경, 무수히 많은 천이 산수화처럼 굽이굽이 펼쳐졌다 치워지는 동안 브루스 웨인은 반 마디를 채 뱉지 못하고 잔뜩 날이 선 팀 드레이크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것이다. 

 반쯤 벗긴 제 후견인을 여름날 화로처럼 구석에 박아놓은 팀은 사백 하고도 일흔 두 번째 둘둘 말린 사라능단을 촥 펼쳐보이며 입술을 잘근거렸다. 짧은 빗금 무늬가 은색으로 수놓인 비단은 고운 비취 빛을 영롱하게 뽐냈으나, 팀의 눈에는 어딘가의 마당을 뽈뽈 기어가는 쇠똥구리의 빛깔보다 못해보였다. 초록색은. 팀이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초록색은 안돼. 왜냐면... 너무 진부하니까. 그래. 게다가 그 감자놈이 으스대며 걸치는 색이지. 홱 던져버리고서 다른 것을 끌어왔다. 당초무늬가 굽이치는 진홍빛 기(綺)가 무릎 위로 흘러내렸다. 빨강. 아까부터 빠듯하게 조여오던 위에 바늘땀이 새겨지는 기분이 든다. 팀은 불쾌함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입술을 비틀었다. 빨강색도 안돼. 너무 대중적이니까. 뭐가 대수냐는 작은 물음이 머리 뒷편에서 속닥거리지만 무시하고서 대충 건너편에 치워둔다. 다른 거 없나, 믿고 맡겨두라더니 선택지가 뭐 이리 협소해. 무지개도 울고 갈 색색깔 직물들을 헤집는 손이 신경질적이다. 서늘한 감촉에 손가락에 걸려 집으니 짙은 쪽빛의 주(紬)가 모습을 드러냈다. 손가락 사이에 넣고 문질러보니 감탄이 나올 듯 매끄럽다. 후처리에 특별히 신경썼는지 명주천 특유의 무광택이 소담하니 고왔다. 말아놓은 끄트머리를 잡고 조심스레 풀어내자 얼음처럼 투명한 질감이 확 살아나 만족스럽다. 좋네. 이 방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떠오른 긍정적인 감상이다. 끝도 없이 꼬여가던 기분이 조금 누그러지는 느낌이 든다. 천을 들어올려 가늠하는 옆으로 브루스가 살그머니 다가앉았다. 


"그게 마음에 드니?"

"뭐... 나쁘지 않네요. 얇아서 겨울엔 못 입겠지만."

"겨울까진 아직 여섯 달도 더 남았잖니."

"그래요, 계획을 미리 짜두는 건 나보다 브루스 전문이니까요."


 빈정거리는 말투엔 악의가 없다. 팀이 비춰보는 천 아래로 브루스도 손을 뻗는다. 이 천을 두어 번 겹쳐 옷을 만들면 딕이 좋아하는 색이 나오겠구나. 조용한 말투에 팀이 멈칫했다. 그 말처럼 자락을 접어보니 겹쳐진 색이 꼭 첫째이자 그가 가장 좋아하는 형의 파랑이 만들어진다. 딕 그레이슨의 파랑빛, 나이트윙의 파랑빛. 왜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선명하고 명백한, 딕만의 파랑색. 겨우 가라앉았나 싶었던 비틀림이 다시금 목을 타고 올라온다. 잡은 천을 그대로 브루스 쪽에 밀쳐버리자 움찔, 놀라며 반사적으로 받아드는 게 훤히 보였다.


"그것도 됐어요. 저리 치워버려요."

"이걸로 고른 줄 알았는데."

"이젠 아니에요."


 입을 꽉 다물고 말하는 통에 발음이 어그러져있다. 더 이상 보기도 싫다는듯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린 셋째는 표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화풀이하듯 천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몸짓에 걸리지 않도록 파란 명주천을 감아 올리며 브루스는 입을 열까 말까 고민했다. 여기서 내가 입을 열어봤자 상황만 악화되는게 아닐까... 갑작스레 제 쪽으로 날아오는 연자회색 천을 받아내느라 생각이 끊긴다. 연이어 유황색, 담록색, 석홍색... 무차별적으로 던져지는 천타래들이 얼굴에 떨어지기 전에 얼른 잡아내었다. 던져지며 반쯤 풀린 천이 머리에 앉고 어깨에 걸쳐지고 몸을 감싼다. 색깔들에 가로막혀 다소 둔해진 귀에 팀의 목소리가 박혀들었다.


"전부 쓸모없는 색깔뿐이네. 이것도, 이것도, 이것도! 다 못 쓰겠어."

"ㅌ..."

"...짜증나..."


 말끝마다 새로 날아오는 천들에 혼미해진 브루스가 셋째를 부르려다 입을 멈춘다. 침묵 속에 브루스의 온몸에 걸쳐진 천들만 부대끼며 사락사락 흔들거렸다. 눈앞에 드리워진 다색의 천들을 조심스레 걷은 브루스 눈에 팀의 등이 보인다. 브루스가 아는 팀은 짙은 빛 도포나 두루마기, 간혹 마고자를 입고 그 안으로는 붉은 계열의 저고리를 착용하곤 했는데, 오늘은 이도 저도 입을 기분이 아니었는지 발목 근처까지 내려오는 미색 중치막 하나만 입고 있다. 허리에 바투 맨 끈까지 같은 색으로 희다. 

 언제나 꼿꼿하고 바른 자세를 하는 셋째지만 집 안에선 모시 방석을 등에 받치고 기우뚱해 있거나, 두터운 채담 위에 엎드려선 그대로 대롱 꽂은 냉차를 빨아먹는 모습을 더 자주 보였다. 빈틈없이, 철저하게, 늘 대비하는 걸 신조로 삼고 있어도 이 집 안에서만큼은 그럴 필요를 덜 느끼는 것처럼. 다시 말해 지금처럼 목에 부러 힘을 넣고 빳빳하게 있는 일은 심상치 않단 표현인거다. 내버려진 천에 시선을 두며 브루스는 최대한 평소처럼 차분히 말을 붙였다.


"쓸모없다고 말하기엔 수고를 들여 부탁한 천이지 않니."

"..."

"처음엔 아니더라도 다시 찬찬히 보면 새롭게 보이는 단서가 많은 법이란다. 가령... 이 아틀란티스 산 광목. 이렇게 보면 단순하고 심심해보인다만, 그 곳에서만 나는 해월(海月)실과 지역 특유의 능직법으로 짠 옷감은 보통 실외에서 진가를 발하지. 바깥으로 가져가 본다면..."

"빼어난 호박색을 띄겠죠, 나도 알아요."


 누굴 멍청이로 보냔 눈빛이다. 그런 눈빛마저도 동생과 형이 닮았다고 한다면 정말 화를 내겠지. 팀은 브루스의 팔을 끌어와 방금 고른 벽옥색에 맞춰보았다. 하얀 속옷 위로 겹쳐보기도 하고, 소매를 걷어 맨 피부에 대어 보기도 했다. 아까보다는 기분이 나아진 것도 같은데 고집스레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된 게 없는 것이 자명하다. 성이 풀릴 만큼 제 몸을 견본 삼게 두며 브루스는 지나가듯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를 꾸며내 이런 저런 옷감을 추천했다. 몇 개는 코웃음쳐지고 몇 개는 대꾸조차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분위기가 제법 풀려갈 즈음, 여상한 말투로 브루스가 입을 열었다.


"왜 갑자기 네 옷을 새로 짓고 싶어졌니?"

"그야 브루스가 도시에 내보이고 있는 정체성을 생각하면 절기마다 옷이 백 벌씩은 필ㅇ... 어, 네? 뭐라고요?"

"옷이야 얼마든지 마음대로 사도 좋고 맞춰도 좋다만, 지금처럼 다량으로 천을 고른 적은 없었잖니."

"아니 그게 아니라, 그 전에... 제 옷이요?"

"그래."


 순간 영민한 담청색 눈동자가 빠르게 깜빡였다. 그것도 잠시, 어깨를 으쓱하며 팀이 못마땅한 소리로 불평을 해온다. 


"잠깐 졸기라도 했어요? 지금 이 고생하는게 다 브루스 옷 고르려고 하는 거잖아요."

"팀."

"집중 안할거면 다시 조용히 있어요. 방해되니까. 색 조합 좀 맞추게 일어서봐요."

"너와 내가 옷감을 맞춘 적이 한 두 번도 아니고, 네가 내 옷을 고르는 기준정도는 잘 알고 있단다. 고민이 정말 심했다면 옷감만 펼쳐 놓을 게 아니라 전문 침선꾼이 십 수명 딸린 가게로 갔겠지."

"...브루스 바쁘잖아요. 그냥 색만 고르고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하려고 그랬죠."

"바로 그거야. 지금 너는 색에 집중하고 있어. 옷을 고르는데 중요한 요소긴 하지만, 정말로 완성될 옷을 지을 목적이었다면 꼼꼼한 네가 색에만 이렇게 집착할 거 같진 않구나."

"집착이라고 했어요 방금?"

"아침에 데미안과 색과 상징에 대해 이야기를 조금 했지. 지금 네가 가진 고민도 비슷할 거 같구나."

"저 고민 없어요. 그리고 그 마귀감자랑 저랑 닮았다는 말따윌 할거면..."

"...레드 로빈의 정체성에 문제라도 생긴 거니?"


 팀 '웨인'스럽게 이어지던 손짓과 이 대화 자체가 의미없기 때문에 너무나도 피곤함을 느끼지만 그래도 예의상 대답은 해주겠단 어조와 심드렁한 발성으로 뚝 멎었다. 제가 가르친 화법이 벗겨지고 드러나는 것은 사춘기를 막 벗어나 앳된 티가 남은 아이 한 명이다. 인내심있게 저를 바라보는 브루스와 눈이 마주치더니, 손에 든 것이 후두둑 떨어진다. 주울 생각도 없었는지 그대로 풀썩 주저앉은 팀이 껴안은 무릎 위에 턱을 얹었다. 주렁주렁 옷감을 매단 브루스도 치마폭처럼 펼쳐진 천자락을 들어올려 앉는다. 길지 않은 침묵도 둘 사이에 끼어들어 가부좌를 틀었다. 브루스는 팀이 준비되길 기다리며 딴청을 피운다. 속내를 트기 전에 가장 시간을 많이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써, 그는 누구보다도 이 조용한 시간끌기가 셋째에게 필요하다는 걸 안다. 허공을 노려보는 시선 그대로 팀이 말을 열었다.


“...그냥 갑자기... 붕 뜬 느낌이 들었어요."

"붕 뜬 느낌이라."

"뭐, 사실 굳이 말로 할 만큼 대수로운 일은 아니고요. 브루스도 알다시피 내가 로빈에서 레드 로빈이 된 지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흐른 게 아니잖아요. 애초에 이름을 바꾸고 제 2의 신분을 새로 고른 것도 갑작스러웠고."

"..."

"탓하는 거 아니에요. 브루스가 그 감자의 출현을 어떻게 미리 알았겠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신이... 그렇게 된 것도... 그리고, 세대 교체는 브루스의 뜻대로 이루어진 게 아니란 거 이젠 이해해요. 게다가 마귀감자가 아니더라도 머지 않은 시기에 내가 로빈을 그만 뒀을걸요? 시작도 내가 먼저 찾아왔으니 끝도 내가 했겠죠."

"그래... 너라면 언제나 올바른 순간에 올바른 길을 찾아냈을거다."


 가감없는 사실 위로 댓잎처럼 다정함을 띄운 말이 건네졌다. 팀은 어깨를 으쓱할 뿐 일부러 브루스 쪽을 보지 않았다. 그 시선에 담긴 애정을 마주하면 잘 눌러 담고 있는 무언가가 터질 것만 같았다. 


"처음엔 하도 일이 바빠서 괜찮았는데, 점점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내가 '내' 자리를 찾은 것이 맞나. 그저 몸 붙이기에 급급해선 임시직을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한 번 확신이 사라지니 사소한 것까지 거슬리기 시작했어요. 내 바깥 복장 색같은, 정말 사소한 것까지도. 형은 파랑이고 제이슨은 빨강, 데미안은 초록. 그럼 내가 입는 색은 뭘까. 난 단지 딕이 될 수 없어서, 제이슨이 아니어서, 데미안에게 뺏기지 않으려고 남은 색을 되는 대로 끌어온 것이 아닐까. 그게 내 자리가 아닐까."

"그렇지 않아. 나도, 그 누구도 절대 널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팀."

"그냥 하는 생각이에요. 지나갈 상념들이니까 신경쓰지 않아도 돼요."

"..."

"말로 하니까 괜히 심각해보이는거라구요. 아무 문제 없어요."

"...네가 찾아온 건 내게 기적보다 더한 일이었단다. 너희들 모두가 그랬지."


 팀이 놀라 시선을 틀었다. 바람이 쓸고 간 자국 하나 없이 맑은 하늘처럼 맑은 눈동자가 저를 보고 있다. 때때로 브루스가 탐정도 배트맨도 후견인도 아닌, '브루스 웨인'의 얼굴을 하고 저를 보는 순간에 팀은 항상 마음이 간지러워졌다. 누구보다 제 자신을 내보이는데 인색한 그가 드물게 쥐어주는 감정은 막연히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보드랍고 순진하기 짝이 없어서,  제가 덥썩 잡아버리면 그만 망가지고 말 여린 것처럼 느껴져서, 그래서 팀은 이 드문 순간이 오면 항상 눈을 피하고 말았다. 예전에 언제였더라, 콘이 조심스럽게 네가 배트맨같다는 건 절대(이 부분에 이상하리만치 힘이 들어갔다) 아니지만, 감정에 연약한 부분은 약간, 닮은 것도 같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땐 정색했지만 어쩌면, 제 벗이 정확히 짚어낸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팀은 처음으로 생각했다. 그게 맞기 때문에 지금 브루스가 속내를 고스란히 내비치는 것이 거북했다. 감정적으로 나오지 않았으면 했다. 탐정처럼, 배트맨답게 굴면 안돼요? 왜냐면, 왜냐하면, 당신이 이렇게 감정적으로 나오면,


"윽..."


 투둑. 착각이라 얼버무릴 수 없을 만큼 또렷한 소리가 났다. 툭, 투둑, 정성껏 꿰맨 솔기 자국을 뜯어낼 때처럼 가느다란 소음이 연거푸 울린다. 하고 많은 천들 중에 하필 제가 입은 천 위로 떨어질 건 또 뭐란 말인가. 주변보다 짙어진 천을 문질러봐도 눈물은 빠르게 번져갈 뿐이었다. 뺨 위로 부드러운 천이 닿았다. 입을 앙 다물고 고개를 든다. 널린 천들은 다 내버려두고 입고 있는 소매를 끌어와 팀의 뺨을 훔쳐주는 브루스가 저를 보고 있다. 안쓰러움이 묻어나는 눈빛이 물기로 어룽진다. 눈가를 문지르면 다시 샘솟는 눈물에 팀은 더 서러워졌다. 닦을 수록 황망한 손을 내리고 브루스가 제 눈물을 수습하게 내버려둔다.


"나도 이래버리니까 당신이 그러는 게 싫다구요..."

"...미안하다."


 내가 뭐라 말하는 줄 알고 미안하다 그러는건지. 앉은 자세를 무너뜨리고 푹, 브루스 위로 엎어지자 어쩔 줄 몰라하면서도 등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느껴진다. 어쩐지 고소한 기분이 든다. 저 때문에 브루스가 애먹는게 좋다니, 이 얼마나 애같은 감성인지. 에라 모르겠다 싶은 기분으로 더욱 고개를 묻은 팀의 귀로 느린 목소리가 내려앉는다. 천 위로 주르륵 미끄러지는 몸을 무릎 위에 눕혀 주며 브루스가 속삭였다. 


"네가... 너만의 자리를 찾기 위해 고민할 시간을 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

"빼앗기는 기분이 들게 한 것도, 내 몫의 책임을 떠맡긴 것도."

"...당신 책임 떠맡은 적 없어요. 내가 해야할 일이니까 한 거지."

"나와 같은 기분이 들게 해서 미안하다."


 팀이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언뜻 생뚱맞은 소리지만 브루스가 무슨 소릴 하는지 그는 안다. 절대 배트맨이 되지 않을거라 말한 팀에게 '배트맨'의 기분을 느끼게 만든 것을 사과하는 것이다. 사과란 건 번거롭기 짝이 없다. 이런 소릴 듣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뒤늦게 오는 깨달음이 함께 올 때면 더더욱. 머리를 일으키려는 위로 따스한 손이 다가왔다. 이마를 둘러 묶은 책(幘)을 풀어내고 맨 피부에 열을 재는 것처럼 손을 올린다.  여전히 물기가 축축한 눈가를 덮고 가만가만 쓰다듬는다. 브루스의 손이 만든 안온한 어둠 속에서 팀은 더 울고 싶기도 하고, 그만 잠이나 자고 싶은 기분도 든다. 코가 먹먹해지는 것을 감추려 일부러 실없는 소리를 내뱉는다.


"위아래로 빠짐없이 사고 쳐대는 형제들을 붙여준 것도 사과하시죠?"


 브루스가 푸스스 웃었다. 표정이 보이지 않지만 자책감과 떼어놓은 거 같아 팀은 안심한다. 좀 더 편안히 무게를 싣고 누운 뒷통수 뒤로 브루스의 옷자락과 겹쳐 앉은 다리가 느껴진다. 


"음, 그래. 그것도 사과하마."

"외동이었다가 갑자기 중간에 낀 셋째가 된 기분이 어떤지 알아요?"

"글쎄, 나도 외동이었어서 모르겠구나. 그래도... 형제가 있었으면 하고 생각한 적은 있었지."

"저도 그랬지만 이건 아니었거든요."

"그 애들도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닐..."

"제이슨이랑 데미안인데요? 그리고 브루스 없는 동안 딕이 어땠는지 제가 말 안해줬던가요?"


 음... 무척 곤란한듯 말을 한참 망설이는 것에 팀이 큭큭 웃었다. 손바닥을 들어올리자 쏟아지는 빛이 잠깐 따갑다. 일어나 앉은 팀의 눈가가 붉었다. 나중에 냉찜질을 해야겠구나. 생각하며 브루스가 화제를 전환했다.


"어쨌든 천이 이만큼이나 있으니, 새 옷은 만들어야지."

"그래야죠."


 선선히 대답하며 방안을 빙 두르는 시선은 한결 홀가분해보였다. 왼쪽 편에 걸쳐져 있던 다홍 천을 집어들며 브루스가 권해본다.


"난 여전히 네게 붉은 색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단다. 푸른 색을 입어도 좋고, 초록ㅂ...(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은 아니고, 황색 계열도 많으니까."

"알아요, 근데 지금은 누구와 닮거나 닮지 않았다는 기준은 다 내려놓고 골라보고 싶어요."

"네 뜻대로 하렴."


 그 후 한동안 천을 걸쳤다 내려놓는 소리와 심심찮게 색의 호불호를 묻는 잡담이 이어졌다. 심심풀이 삼아 취람색 천을 몸에 둘둘 말아보는 팀에게 브루스가 "캐롤라인이 생각나는구나." 농을 던지기도 했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봐도 뭐가 문제냐는듯 고개를 기울여보이기만 할 뿐인 브루스에게 팀도 지지 않고 연지빛 천을 던져주며 당신이 이걸 입으면요, 맞받아쳤다. 색도 고운데 못할 이유가 어딨겠니. 여벌 무지기치마가 남아있을지 모르겠구나. 네 걸 해입고 남은 걸로 내 장옷을 만들어도 잘 어울리겠는걸. 눈 하나 까딱않고 담담하게 말하는 브루스에 팀도 조금 진지해져선 내가 그 때 잘 어울리긴 했죠, 위장 임무인데 말 한 번 붙여보려는 사람들이 어찌나 많던지. 태연하게 자기자랑을 하는 것이다. 아무런 생각도 계산도 없이 도란도란 어울리는 시간은 즐거운 만큼 야속할 정도로 빠르게 흘러갔다. 신시가 다 지나갈 무렵에 팀은 결정을 내렸다.


"...이걸로 할래요."

"그러렴. 잘 어울리는구나."

"...음..."

"더 고민하고 싶으면..."

"아뇨, 이 색이 마음에 들어요. 그건 확실해요."
 

 단호히 말하면서도 입술을 다시 잘근거리기 시작하는 팀에게 브루스가 슬쩍 조언했다.

 

"꼭 한 가지색만 고르리란 법은 없지."

"...그건 좀 편법같아서요."

"딕도 잠깐 빨강색으로 바꾼 적이 있었던 거 알잖니. 파랑색을 고수하던 시절에도 그게 다 한결같은 파랑색이지 않았단다. 지금도 흑과 청 두 가지 색이지."

"...그럼 이것도."


 못 이기는 척 고르는 천이 눈에 익숙한 적색인 것에 브루스는 빙그레 나오려는 웃음을 사려물었다. 그러고도 불만족스러워 보이는 얼굴에 아까부터 눈여겨보던 천을 하나 내밀어본다.


"...송화(松花)빛깔이네요."

"싫니?"

"그런 건 아니지만... 브루스가 주니까 뭔가 꿍꿍이가 있어보여서요."


 조금 많이 억울해진듯 쳐지는 눈썹에 팀은 아님 말고요, 라며 천을 받아 챙겨두었다. 어른이 입기엔 지나치게 밝은 노랑이 아닌가 싶지만 뭐 어떠랴. 가장 먼저 골라놓은 색을 다시 들어 몸에 대어보았다. 다자색이라기엔 연하고, 흑홍색이나 자황색을 닮았지만 둘보다는 더 짙은 나무색 천은 새의 깃털처럼 반지르르하다. 이게 팀 드레이크의 새로운 밤의 빛깔이 될 지 확신할 수 없지만, 적어도 팀이 스스로 고른 색이란 점에선 확실하다. 먼저 이 색으로 소매 없는 쾌자를 만들어볼까. 


"허리에 두를 띠는 노랑빛이 어울릴 거 같구나."


 팀의 마음을 읽은듯 자연스레 덧붙이는 말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본다. 거듭 노랑빛을 권하는 것이 지레 찔렸는지 브루스는 강요하는 건 아니라고 말을 덧붙였다. 괜찮아요. 원래도 노랑색은 자주 입었으니까. 말하면서 팀은 아까 집어들었던 취람색과 연지빛 천도 잘 챙겨두었다. 종아리까지 오는 천의 무게를 느끼며 이리저리 걸어다녀보니 제작할 옷의 상(像)이 보다 명확해지는 것 같다. 알프레드가 보기 전에 널부러진 천들을 대충 상자에 쓸어넣으며 새 옷에 더할 요모조모를 말하는 목소리에는 기대가 한숟갈 듬뿍이다. 셋째가 말하는 설명을 듣던 브루스의 머릿속에 문득 곱게 깃털을 빼입은 어떤 새의 모습이 퐁, 떠올랐다. 완성될 옷의 전체적인 배색이 조금쯤, 원앙을 닮아있을 거 같단 감상은 현명하게 입 안에 묻어두기로 한다. 개운한 얼굴로 옷감을 안은 팀과 팔 옆으로 뒤로 흘러내리는 천자락을 잡아 주며 따라가는 브루스의 위로 아직 노란 햇살이 선명하게 쏟아졌다. 

 

3. 夕


"엇."
“아...”


 두 사람이 동시에 몸이 굳었다. 목이 길고 검은 수화자(水靴子)를 손가락에 걸고 격자 무늬 들창을 손쉽게 넘어 들어오던 제이슨 토드와, 그 아래 옷장 문을 열고 몸을 숙인 브루스 웨인은 똑닮은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흔들림 하나 없이 얼어붙은 둘의 모습이 꼭 연극같았다. 먼저 버럭 소리를 지른 쪽은 제이슨이었다. 


"영감탱 내 방에서 뭐해?!"

"!...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긴 뭐가 아니야!"


 재빠르게 넘어온 제이슨이 덮치기 무섭게 후다닥 민첩하게 회피한 브루스가 뻔뻔한 표정으로 벽에 붙어섰다. 열렸던 옷장 문이 원래대로 닫힌 것에 제이슨이 가늘게 눈을 떴다. 문고리를 당겨보았지만 팔괘가 새겨진 잠금쇠가 덜컥일 뿐 열리지 않는다. 허, 코웃음 친 제이슨이 험악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 쪽으로 조용히 움직이던 브루스가 움찔한다. 단번에 거리를 좁히고 문을 가로막자 시선을 피하며 슬금슬금 몸을 움직인다. 제 방안에서 꼬리잡기를 할 마음이 없는 제이슨이 손을 펴보이며 으르렁거렸다.


"열쇠 내놔."

"신경쓰지 마렴."

"뭘 신경 쓰지 마. 안 주면 저거 확 부숴버린다?"

"섣불리 가구를 부수면 알프레드에게 혼나는 거 알잖니."

"아 그러니까 열쇠 내놓으라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버릇은 그만두기로 했잖니."

"말 돌리는 솜씨 한 번 예술이네. 잔말말고 빨리 열쇠 안 내놔?"

"...그냥 내가 열어주마."


 허. 짙은 눈썹이 의외라는 듯 들썩였다. 한참을 더 입씨름하거나 그도 아니라면 제이슨의 빈틈을 노려 도망칠 줄 알았는데. 여전히 시선을 애매하게 피한 브루스가 천천히 열쇠를 꺼내 잠금을 풀었다. 보란듯 문짝을 활짝 열어보이기까지 한다. 다가선 제이슨이 대충 안을 훑었다. 어린 시절부터 써온 제 옷장 안 구조쯤은 눈 감고도 훤하다. 무척 수상쩍은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손댄 흔적은 없었다. 빈틈없이 닫힌 서랍들과 귀퉁이에 조각된 새와 꽃 장식들 곳곳에는 먼지 하나 앉지 않았다. 누구 하나 트집잡지 못할 말끔함이 더 의심스러웠다. 살인 현장도 원래 증거 인멸 한 직후엔 말끔해보이는 법이다. 제이슨은 여전히 꾸깃한 얼굴로 브루스를 추궁했다.


"뭐 했는데?"

"아무것도 안 했단다."

"그걸 믿으라고?"

"방 안 점검 차 한 번 열어본거란다. 오늘 새 옷감들이 무척 많이 들어와 넣어둘 장소도 필요했고..."

"옷감? 옷감이 뭣땜에 많이 늘었는데?"

"팀이 쓸 데가 있었단다."


 보렴. 맨 윗쪽 서랍을 열어보이자 과연, 윗쪽에 새로 접어 넣은 것이 분명한 적토색 모시가 보란듯 놓여있다. 그래, 보란듯이. 서랍과 제 사이에 브루스를 몰아두고 사납게 노려보았지만 아까보다 당당함 붙은 벽색 시선만 돌아올 뿐이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이걸로 심문이 끝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거만한 표정을 지은 제이슨이 일단 기세를 물렀다. 그 틈을 타 브루스가 역공을 시도한다.


"왜 대문으로 들어오지 않고 창문을 넘어온 거니?"

"뭐, 뭐 내 방인데 들어오는 방식이야 내 맘이지!"

"알프레드가 섭섭해할텐데..."

"남이사. 신경 꺼."


 잘 있던 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미는 기분이 들어 제이슨은 거칠게 등을 돌려 버렸다. 알프레드만 그렇다는 거지, 우라질. 의미없는 욕설이 입술 근처를 비집고 나온다. 여전히 들고 있던 신을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흙 묻을 바닥을 신경써서 일부러 벗고 들어왔건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움직일 때마다 옷 아래로 매어놓은 가면이 괜히 거슬리는 것만 같아 시시각각 기분이 추락했다. 끄집어내어 침상 쪽에 던져놓자 생각보다 큰 소리가 덜걱 울렸다. 내침 김에 몸을 빈틈없이 감싼 붉은 협수(狹袖)도 벗어 던졌다. 팔 아래로 질긴 천을 감싸 딱 붙게 만든 옷은 쥐어 패는 싸움판에야 편하지만 실내에선 답답했다. 옷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일지도. 제기랄. 한결 얇아진 홑겹에도 몸이 답답하다. 난폭한 서슬이 이어지는 동안 조용하던 브루스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나도 네가 문으로 들어오는 게 더 좋구나."

"영감탱이 좋든 말든 내가 무슨 상관인데."

"...오랜만에 온 거잖니. 지금처럼 창문으로 드나들면... 온 것도 늦게 알게 되고..."


 ...그러면 얼굴도 늦게 보고... 달팽이마냥 점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는 아주 작았지만 브루스가 말할 때부터 귀가 쫑긋 섰던 제이슨에겐 충분히 들렸다. 경직되어 있는 줄도 몰랐던 어깨에서 힘이 소르르 빠져나간다. 머릿속을 들쑤시던 부아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만다. 뭐라 대꾸하지 않고 팽개친 신을 다시 주워들었다.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널부러진 겉옷을 다시 주워들었다. 금방 다시 나가려는 건가 싶어진 브루스가 조금 더 있다가지 않고... 급한 만류를 채 뱉기 전에 제이슨이 먼저 방을 나섰다.


"신발 두고 올래."

"...! 그래. 그러렴."

"아직 어두워지기 까지 시간 있으니까 이야기나 좀 더 하던가. 안해도 상관없어."

"너만 좋다면, 앉아서 말하자꾸나."

"영감탱이 싫지 않다면 뭐. 어디든 상관없어. 대청으로 나가도 좋고. 오늘 날 좋더라."

"그래, 그러자."


 너만 좋다면, 싫지 않다면, 굳이 붙이지 않아도 될 말을 주렁주렁 단 모양새가 조금 우습기까지 하다. 솔직하지 못한 점까지 닮아 있는 둘은 방을 나서면서도 계속 너만 좋다면, 싫지 않다면 돌림 노래를 불렀다. 잠깐 집을 비운 집사가 보았다면 한숨을 폭 내쉬었을 광경이다. 

 제이슨이 머무를 의사를 보인 후로 브루스는 다소 평정을 잃은 듯 보였다. 들뜬 기운이 손짓마다 묻어나면서도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 예민한 동물같았다. 어디 안 간다니까. 불퉁하게 말을 해도 영 안심이 안되는듯 부엌에 가서 대접할 거리를 만들어오겠다며 소매를 걷는 통에 식겁한 제이슨이었다. 됐어, 우물에서 물이나 떠오면 돼. 말려보았지만 그건 도리가 아니라며 한사코 고집을 부려댄다. 알프레드가 정갈히 넣어둔 찻잔을 고르고 다과를 내올 접시를 쟁반에 놓는데 왜 그리 달각달각 소음이 큰 지 모를 일이다. 여기 쭉 살았던 브루스보다 한동안 집을 비운 제이슨이 부엌 집기의 위치에 더 빠삭했다. 찻잎을 내오겠다며 장독대 그릇을 열어보는 것에 머리를 안 짚을 수가 없었다. 날붙이도 불씨도 있는 부엌을 들쑤시고 다니면서 어떻게 소매 한 번을 갈무리할 생각을 못하는지. 대체 저런 정신머리로 어떻게 배트맨을 하는건지. 속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족족 입으로 말하며 면박을 주자 제법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포기 하지는 않는다. 그래 저러니까 배트맨이 됐지. 머리를 내젓는 제이슨의 입가에 큭큭, 낮은 웃음이 들풀처럼 살랑거렸다. 

 미지근하게 마시자고 해도 이 차는 꼭 따뜻하게 먹어야한다길래 결국 제이슨이 불을 지켜보기로 하고, 브루스는 안전한 창고에 가서 매작과와 강정을 담아 오라 보냈다. 물을 따르자마자 확 피어오르는 귤꽃과 유자 향기에 제이슨이 피식 웃는다. 두 가지 모두 그가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던 차였다. 김이 훈훈하게 오르는 찻잔위로 조각보를 덮어두고 브루스를 찾으러 나가니 아니나다를까 사고를 쳤다. 배가 둥근 꿀 항아리를 거북이처럼 들여다보며 동동 거리길래 어이없어 했더니, 마침 갓 뽑은 가래떡이 있길래 꿀이랑 함께 내올까 했는데, 국자가 보이지않아 급한 대로 주변에 있던 밥숟갈을 썼다가 그만 퐁당 빠뜨리고 말았단다. 서서히 가라앉는 수저를 잘 세우면 어떻게 건져낼 수 있을 거 같아, 덜어온 강정 중 제일 길쭉한 조각을 집어 푹푹 빠져들어가는 수저에 닿게끔 해보다가 그것마저 빠뜨리고선 잔뜩 주눅들어있다. 와... 어쩜 이러냐. 통으로 다 버려놨네. 영감탱, 알프레드가 진짜 섭섭해하겠는데. 능글거리자 뭐라 할 말이 없는지 고개를 푹 숙인다. 일단 빠진 떡을 쑥 건져내고 꿀이 거미줄처럼 묻은 소매에도 물을 끼얹었다. 나중에 처리하는 법 가르쳐줄게, 그냥 나와. 밤마다 꿀 찍어먹고 한 번도 안 걸린 사람이 나잖아. 속 편한 소리를 하자 뒤를 흘끔거리면서도 순순히 따라나왔다. 우리 둘 다 어른 되긴 글렀다고 생각하며 제이슨이 피식 웃었다. 

 해가 거의 넘어가는 바깥을 보며 나란히 앉은 둘이 호로록, 차를 불어 마시는 소리가 평화롭다. 꿀에 흠뻑 젖은 가래떡을 적당히 조각내서 먹으니 혀가 녹아내릴 듯 달다. 반쯤 비운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브루스가 운을 뗐다.


"그 동안 잘 지냈니?"

"뭐, 그럭저럭. 로이도 스타 시티에 돌아갔고 코리는 시타델 쪽에 꼬리 밟히기 싫다고 잠깐 잠적. 충분히 안전하다 싶을 때 찾아낼거야. 코리가 우리를 찾든, 우리가 코리를 찾든."

"셋이서 아주 바쁘게 돌아다녔나 보구나."

"당신만 하겠어요. 이 똥통은 언제나 시끄럽더만. 자경단만 몇이 붙어있는데... 참나."

"블랙 마스크와 갈등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걸 갈등이라 부를 수 있나? 우리가 일방적으로 발랐는데. 왜 새삼스럽게 물어봐요? 내 소식 정도는 다 염탐하고 있었으면서."


 별 생각없이 말한 건데 브루스가 눈에 띄게 움찔한다. 매작과를 아작아작 씹어먹던 제이슨이 어이털린 표정을 지었다. 아니, 당연한 거 아니야? 그럼 내가 잠깐 나갔다고 내 소식 쪽엔 신경 끊고 지내려고 했어?! 상당히 비껴나가있는 불만을 터뜨리자 브루스가 황급히 부정했다. 그래도 내가 알아보는 것과 네가 말해주는 건 다르잖니. 변명하는 것에 콧잔등을 구겼다. 떨어져있어도 브루스는 제이슨을, 제이슨은 브루스를 포함한 박쥐 가족에 계속 시선을 두는 것. 누군가는 비정상적인 행동이라 부를 이것을 레드 후드는 의리와 신뢰라고 여겼다. 염탐을 못 알아채는 쪽이 멍청한거지. 이쪽도 저쪽도 다 알고 하는 건 괜찮다고. 
 

"딕은 어때."

"건강하단다. 신경쓸 일이 많아서 바쁘지만."

"영감탱 때문인 거 아니야? 물어보나 마나 팀도 죽어나가겠네."

"꼭 그럴 필요는 없지만 사업에 뛰어들기로 한 이상 제 욕심껏 해야 직성이 풀리겠다더구나."

"그 꼬마 악귀는?"

"데미안이라고 부르렴. 매일매일 발전하고 있어. 오늘밤은 스몰빌에 외지수행 겸 친구와 야영하라고 보냈단다."

"허, 걔가 순순히 야간 근무를 빠진다 했다고?"

"약간의 거래가 있었지. 소형 장갑차를 하나 만들어줬는데 무척 좋아하더구나. 돌아오면 딕과 단둘이 임무를 하나 보내볼까 한다. 아닌 척하지만 딕과 합이 잘 맞아서 스스로도 기쁜 모양이야. "

"버릇 나빠질 걱정은 없겠군. 그 이상 나빠질 성격이 어딨겠어." 


 어쩐지 앞뒤 재지 않고 날뛰는 장끼 꽁지에 고삐를 매달고 이려이려 몰아가는 딕의 모습이 떠올랐다. 너 따위 인정못한다며 덤벼드는 것을 좋게 받아주어 때려눕혔더니 바짝 독이 올라 컁컁대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하다. 다음에 만나면 또 약올려야지. 두 번째 잔을 채워 꿀꺽 들이킨 제이슨이 약간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이것도 맛있지만 지금처럼 청명하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간에는 차보다 더 어울리는 음료가 있는 법이다. 브루스를 흘끗 건너다보고 품 안에 잘 넣어온 병을 꺼냈다. 뭐냐는듯 물어오는 눈길에 목이 길쭉한 도자기를 흔들어보였다. 찰랑찰랑 소리가 크게 났다.


"맞춰봐요."


 이미 뜯은 흔적이 있는 마개를 열고 주둥이를 대어주자 브루스가 고개를 숙여 향을 맡는다. 훅 끼쳐오는 쓴 향에 이마를 잔뜩 찌푸린다. 코가 아릴 듯 독한 내음 끝자락에 희미한 꽃향기가 달게 감도는 듯도 하다.

 

"술 마셨니?"

"한 모금, 진짜인지 아닌지 맛만 봤어요. 좋은 술이야."

"무슨 종류인지는 알고 마셨니?"

"아 진짜 날 뭘로 보고... 백화주(百花酒)잖아. 걱정마요. 진짜 쬐끔만 마셨다니까."


  술 마시고 말이라도 몬 건 아니겠지. 마뜩찮게 물어보는 걸 못 들은 척 빈 잔에 술을 따랐다. 반쯤 채우기도 전에 병목을 잡고 도로 세운 브루스가 쓱, 도자기 째로 가로채갔다.

 

"아 뭐예요!"

"나중에 마시렴."

"내가 암만 죽어서 몇 년 꿇었다지만 엄연히 어른이거든요?"


 가볍게 말했다가 조금 아차 싶은 제이슨이 괜스레 뒷목을 쓸었다. 죽은 건 저인데 왜 남의 눈치를 봐야되나 싶은 마음보다도, 어쩔 수 없이 브루스의 기분이 더 신경쓰인다. 브루스가 제이슨의 손에서 마개까지 뺏어간다. 꾹 눌러 봉하고선 저만치 밀어놓았다. 


"안 버릴테니까 나중에 마시렴. 아침에라던지."

"...보통은 아침에 술은 절대 안된다고 하지 않아요?"


 삐죽하니 토를 달자 브루스가 살풋 웃었다. 바깥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짓궂은 미소가 어둑어둑 날이 저무는 바깥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밝힌다.


"우리가 보통 가족은 아니니까."


 싱거운 말에 제이슨이 푸하, 시원하게 웃어버렸다. 개구진 웃음이 만발한 얼굴은 꼭 소년처럼 보인다. 머리 위에 불을 켜 달자 은은한 채광이 둘을 감싸고 동그랗게 퍼졌다. 둥근 빛을 방석삼아 좀 더 붙어앉은 둘 사이에 편안한 침묵이 흘러 간다. 제이슨이 문득 질문했다.


"내 방에서 뭐 가져간 거야?"


 남은 강정을 또각또각 부숴 입에 넣던 브루스가 음, 애매한 소리를 냈다. 또 말해주지 않고 발뺌하려나 싶어 좀 더 추궁해보기로 한다. 


"옷감인지 뭔지 넣어두려고 했다는데, 그게 다는 아니지? 내 방이고 내 서랍이야. 하나하나 돌보진 않아도 넣어둔 물건 쯤은 다 기억한다고. 거긴 뭐 더 넣을 공간 같은 거 없는 서랍이었어요. 근데 천을 넣었다는 건 다른 하나를 빼냈다는 거잖아."

"..."

"이젠 말해봐요. 뭔데요?"


 제이슨의 지적을 듣는 브루스의 눈에 자랑스러움이 반들반들 빛났다. 예리하구나. 칭찬 다음에 조금 뜸을 들이며, 브루스가 제이슨의 눈치를 살폈다.


"말해주면 화 내지 않을거니?"

"...그거야 내용에 따라 다르죠. 내가 화낼 물건이에요?"

"그게... 일단 네 물건이니까. 내가 멋대로 꺼내본 것도 맞고...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도 하고..."


 아리송한 대답에 제이슨이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리자 브루스가 제 소매 안에 손을 넣는다. 조심스럽게 꺼낸 물건은 상당히 작아보인다. 몸을 숙여 들여다본 제이슨이 잠깐 어리둥절해 하는 표정을 짓다가 확, 얼굴이 붉어진다. 브루스의 손 안에 곱게 접힌 다홍빛 볼끼는 두툼히 덧댄 털 색이 조금 흐려진 것 빼곤 아주 멀쩡해보였다. 


"아 이걸 왜 뭣하러 놔뒀어?! 진작 버렸어야지!"

"무슨 소리니, 네 옷인데."

"십 년 전에나 그랬겠지!!"

"그 정도로 오래 되진 않았다."


 아 아무튼!!! 어린애 때나 쓴 걸!!! 이마까지 붉게 변한 제이슨이 손을 뻗어 볼끼를 낚아채려 했다. 부리나케 손을 물린 브루스는 양 손을 딱 모아 버렸다. 작은 병아리라도 품은 듯한 행동이다. 내놓으라고 난리 치는 제이슨을 피해 요리조리 몸을 움직이며 브루스가 항변했다.


"이거 좋아했잖니 제이슨."

"그러니까 그게 언제적 일이냐고요 이 영감탱이야!"

"네가 안 좋아졌더래도 내가 아직 좋아하니까 가만 두렴."

"애새끼 옷이 필요하면 데미안 손잡고 사러 나가라고!"

"데미안은 데미안이고, 너는 너니까 다르다."

"참 나, 진짜..."


 잡힐듯 안 잡히는 몸을 노리다가 맥이 빠진 제이슨이 열이 오른 이마를 감쌌다. 퍼뜩 머릿속을 생각에 빽, 갈라진 목소리로 외친다. 


"처음이 아니라면 이거 말고도 더 있어???"

"음..."

"미친, 얼마나요???"


 여전히 양 손을 모은 브루스가 생각에 잠기더니 모은 손 끝으로 상자를 그려보였다. 가로 세로 높이 모두 다 세 척 정도 넘는 큰 면적에 제이슨이 앓는 소리를 냈다.


"세상에..."

"네가 쓰던 복건이랑 초립도 다 넣어놨단다. 한 번 볼래?"

"뭣하러 봐요 그런걸..."


 불퉁하게 말했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고조된 브루스의 손에 끌려 안채로 들어간 제이슨은 제 앞에 펼쳐지는 과거의 향연에 그만 흐린 눈을 하고 만다. 보기 전에는 기억 저편에 묻어 두었던 여러 의복들이 거기 다 있었다. 섬세하게 수가 들어간 버선이며, 비 오는 날 썼던 갈모에, 첫 생일 때 브루스가 선물해준 연자색 창의까지. 제이슨의 기억만큼 또렷한 색과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옷들이 상자 가득이었다. 무척 조심스러운 손길로 갈모를 꺼낸 브루스가 빙그레 웃었다.


"이거 기억하니? 장마 때 네가 꼭 가장 높은 추녀마루에 가야한대서 봤더니, 네가 제일 좋아하는 잡상(雜像)에 이거랑 기름 먹인 비단 도롱이를 씌워줘야 한다고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데..."

"웃으면 가만 안둬요."

"안... 웃는 단다. 큼. 네가 생각해도 참 귀엽지 않니."

"아 그럼 어쩌라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돌요괴가 일주일 내내 비를 맞게 생겼는데!"


 울컥 짜증내는 제이슨에 끝내 웃음을 참지 못한 브루스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호롱불을 받아 유독 투명하게 비치는 먹빛 비단이 서로 부대꼈다. 몸 뒤로 팔을 짚고 길게 누운 제이슨은 볼끼를 가지런히 개켜 상자에 넣어두고 쓸어보는 브루스를 가만히 바라본다. 오직 저 혼자만 과거를 곱씹길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브루스도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내가 잊지 않은 것처럼 당신도 모두 기억하나요? 속엣말로 물어본다. 당신도 그 기억들이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만큼 소중해요? 촛불빛이 아른거리는 얼굴을 보고 있자면 답은 굳이 듣지 않아도 될 거 같았다. 버들고리에 물고기 모양 잠금쇠를 채우고도 옻칠한 다른 상자에 또 넣는 손길이 무척 정답다. 숫자가 새겨진 판을 맞춰 푸는 형태의 자물쇠를 어깨너머로 본 제이슨은 0, 8, 1, 6 나열된 숫자를 보고 억지로 천장 쪽에 눈을 돌렸다. 돌아앉은 브루스가 도포 자락을 매만지는듯 싶더니 머뭇머뭇 물었다.


"...내가 이러는 게 싫으니?"

"...아뇨."

"다 네 옷이니까, 원한다면 언제든 가져가렴."

"그냥 둬도 돼요. ...어차피 여기가 내 집이고."


 차를 너무 많이 마신 게 분명했다. 아니면 단 걸 너무 많이 먹었거나. 기름칠을 한듯 매끄럽게 돌아가는 혀는 제가 할 거 같지 않은 말도 술술 뱉는다. 멀거니 반대편 마루를 보며 딴청을 피우는 제이슨 뒤로, 브루스는 제 손바닥을 꾹 힘주어 누른다. 내가 이런 말을 들어도 되는걸까. 그런 자격이나 있을까. 못난 생각을 들키지 않으려 애쓴다. 집 저 편에서 자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몸을 일으킨 제이슨이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여상하게 물었다.


"나갈거죠?"

"...그래."

"실력 좋은 동반자 하나 필요해요?"

"언제나 그렇지."


 씩 웃은 제이슨이 뚜둑, 소리가 나도록 주먹을 꺾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굴을 향해 가며 브루스는 새콤달콤한 향이 밴 옷자락을 벗어 바닥에 떨어 뜨린다. 알프레드가 아직 그 버릇을 안 고쳤다니. 옆에서 이죽이는 목소리를 하면서도 제 방에 훌쩍 뛰어올라가는 발걸음이 경쾌하다. 다과와 잡담에 따끈하니 열이 오른 피부에 냉수를 묻혀 쓸어넘기자, 호수 밑바닥보다 시리고 시린 벽색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목을 빈틈없이 덮고 어깨를 장막처럼 감싸 발끝을 넘겨 떨어지는 검은 옷은 아무리 얇고 질기게 만들어도 묘한 무게가 느껴졌다. 뿔처럼 솟은 귀가 달린 검은 가면을 쓰고 혁대를 채우자 기다렸다는듯, 머리까지 덮는 붉은 가면을 쓴 둘째가 옆에 섰다. 오늘 일 다 하면 백화주 마저 마셔도 되는거죠? 그러렴. 좋았어. 그럼 한 잔 쯤 나눠줄테니까 기대해요. 휘어진 눈썹과 깊게 파인 눈 부분은 인간의 탈인지, 망량의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무시무시하다. 조무래기는 눈만 마주쳐도 졸도할 행색들을 하고서, 저들끼리는 퍽 쾌활한 웃음을 지어 보인 두 부자는 긴 밤을 나란히 종횡하고자 뛰어오른다.

 

4. 曙 

 어스름히 밝아오는 하늘을 등진 나이트윙은 마지막으로 도시를 쭉 훑어 보곤 기와로 덮인 마천루에서 훌쩍 뛰어내린다. 한기를 머금어 차가운 공기를 단번에 찢으며 아찔한 높이를 떨어지는 건 그만의 소소한 오락이다. 언제나 긴장을 놓지 않으며 즐기는, 일상 속의 도전과제. 땅에 닿기 세 장(丈)쯤 남기고 가볍게 몸을 돌려 재주를 넘는다. 몸에 딱 붙게 만든 옷에서 단연 눈에 띄는 부분은 가슴 부근에서 길게 나부끼는 짙푸른 천이다. 얇디 얇으면서 질기고 가벼운 천은 물에 떨어뜨린 빛깔처럼 매혹적으로, 그리고 소리없이 나부낀다. 나이트윙의 모든 움직임은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은밀하다. 바람 부는 대로 휘날리아직 어둠에 잠긴 지붕 위에서 졸고 있는 고양이가 게슴츠레 눈을 떴지만 밤새 거리를 누비고 다닌 푸른 새는 발견하지 못하고 다시 눈을 감아버린다. 

 블러드헤이븐 근처에 위치한 딕의 안전가옥은 웨인 저택만큼이나 아늑하지만, 밤새 홀로 돌아다닌 몸에는 그것마저도 부족할 때가 있다. 오늘이 딱 그런 날이었다. 그가 나이트윙으로 독립한 지도 많은 시간이 흘렀고, 블러드헤이븐의 고유 자경단원으로 이름을 날린 것도 만만찮게 오래되었지만, 딕은 제가 본적은 언제나 고담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곤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가족들이 있는 곳이 고향이니 말이다.

 그러니 지금처럼, 집에 돌아가는 길에도 영 뻐근하고 찜찜한 느낌이 남는 것은 타향 생활을 오래 한 이들이 흔히 겪는 향수병 증세라고, 딕은 누구에게랄 것도 없는 혼잣말을 한다. 집에 가는 길이지만 집에 가고 싶다. 작게 투덜거렸다. 들어줄 이 없는 수다는 즐겁지가 않다. 오늘로 일은 다 끝냈으니까, 하루쯤 더 후처리를 살핀 다음에 돌아가면 돼. 내일 모레면 '집'에 갈 수 있어. 가면 제일 먼저 마루에 드러누운 다음 종합강정 잘게 빻아서 우유에 잔뜩 말아 먹어야지. 브루스도 알피도 보고, 팀도 데미안도 보고... 제이슨은 오늘쯤 돌아올 때가 됐다고 들었는데. 아무튼, 금방이야. 꿋꿋하게 자견해봤지만 별 도움은 안된다. 시간이 약이다, 시간이 약이야. 되뇌이면서 딕은 주발 쳐진 창문을 단번에 넘어갔다.


"어서오렴."

"끄악?!"


 하마터면 심장을 뱉을 뻔한 딕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제 침상 옆 바닥에 쭈그려 앉은 브루스를 쳐다봤다. 


"광대패출신 왔냐으아? 브루스, 브루스, 쟤 지금 어떻게 들어왔어요?"

"창문."

"하! 그럴 줄 알았다니까! 내가 맞췄으니까 나중에 고기 찐빵 사줘요~~!"

"그래, 약속이니까. 그래도 딕, 창문 말고 문으로 들어오도록 해보는 게 어떻겠니."


 담담한 말투와 끝이 한량스럽게 늘어지는 말투가 번갈아가며 주거니 받거니 만담을 한다. 침상 너머를 건너다 본 딕은 바닥에 대자로 뻗은 것도 모자라 앞섶을 다 열어 젖히고 배를 드러낸 둘째 동생을 보고 기함했다. 얼굴이 불콰한 거 보니 거나하게 걸친 모양이다. 딕이 아는 제이슨의 주량은 많았으면 많았지 결코 적지 않은데 얼마나 퍼마신 건가 싶었다. 물어볼 필요도 없이, 제이슨 주변으로 넓게 퍼져오는 술 내음이 무척 짙은 걸 보니 못해도 쉰 홉은 넘게 마셨겠구나 싶다. 제이슨 쪽은 상황파악이 그래도 금방금방 되는데... 아직 혼란함이 다 가시지 않은 얼굴로 딕은 무릎 걸음으로 브루스에게 다가갔다. 
 

"브루스, 같이 마셨어요?"

"응."

"얼마나요? 무슨 술인데요? 언제부터요?"

"음... 인시 즈음에... 백화주로 시작했는데, 마시다보니 없어져서... 고량주랑, 국화주랑, 이화주랑..."

"대체 얼마나 퍼마신 거예요!?"

"그냥, 제이슨이랑 술 내기를 조금 했단다."

"네에?!"

"내가 질 때마다 마셨으니까 별로 안 될 거다."

"웃기시네! 야 딕, 브루스 오늘 한 번도 못 이겼어. 전부 내가 이겼다곻~"


 낄낄거리는 말에 딕이 돌아보지도 않고 목침을 휙 던졌다. 콩!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퍼지는 걸 보니 정통으로 맞은 모양이다. 아 씨, 뭐야! 울컥 짜증을 낸 제이슨이 목침을 더듬더니 제 머리 아래 괴고 다시 누웠다. 눈을 흘긴 딕이 브루스를 찬찬히 들여다봤다. 널부러진 둘째와 달리 허리를 반듯하게 펴고 앉은 브루스는 겉보기엔 멀쩡하다. 동백열매처럼 붉고 살짝 퉁퉁 부어있는 귓가만 아니었다면 멀쩡한 상태라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브루스의 모든 것을 다 안다 자부하는 딕이지만, 이만큼 취해 있는 모습은 정말 처음이다. 딕이 보는 줄은 아는건지, 생각이 깊이 빠진 표정으로 제 손을 향해 내리깐 눈이 더없이 차분했다. 자그맣게 들려오는 뽀시락뽀시락 소리에 무릎 위로 얌전히 모은 손을 살짝 들어올리자 고분고분 따른다. 손을 펼쳐보니 푸스스 날리는 땅콩 껍질이 소복하다. 부스러기를 마저 털어내더니 알알이 까낸 견과류를 느닷없이 딕의 입가에 들이밀었다.


"제이슨이 소금 넣고 볶았단다. 맛있어."

"아 자꾸 계속 마실거면 안주랑 같이 마시라고 고집부리자나~ 그래서 볶았는데 너무 많더라곸."


 강냉이도 튀겼는데 그건 다 먹었어. 미안. 감은 눈으로 손사래를 치는데 다른 쪽 주먹에 움켜쥔 강냉이 무더기가 훤히 보이는 것이 어이없었다. 한사코 입에 넣어주려는 것에 얼결에 받아먹었더니 조금 멍한 얼굴로도 빙긋 웃었다. 난데없이 취한 가족 둘을 떠맡은 상황에서도 저 웃음에 긴장이 스르르 풀리는 걸 보니 자신도 참 답이 없었다. 한알 씩 자꾸 넣어주는 땅콩을 받아먹으면서 딕은 브루스를 살살 구슬렸다.


"그래요 그래요, 기분 좋게 마신 모양이네요. 얼마나 기분 좋았으면 아들 집에 말도 없이 와서 기다리고, 누가 보면 우리 브루스 아닌 줄 알겠어요 그쵸?"

"신은 제대로 벗었단다. 그렇지, 제이?"

 

 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예의바른 놈인데~ 대꾸하는 목소리가 가물가물한 거 보니 곧 있으면 코를 골 거 같았다. 땅콩이 다 없어졌는데도 자꾸 뭘 먹여주려는듯 헛손질하는 브루스를 일으켜 침상에 앉혔다. 입고 있었을 갑주와 망토가 어디있나 했더니 제이슨이 요처럼 깔아 눕고 있었다. 대충 손을 뻗어 수납장에 넣어둔 숙취 해소용 탕약이 있나 살펴봤지만 잡히는 게 없었다. 아 미리 채워둘걸. 아쉬운 대로 휴대용 물병 중 하나를 집어 브루스에게 내밀자 진지한 낯빛으로 고맙다고 하곤 그대로 품안에 넣어버린다. 아니 마셔야죠 브루스. 다른 하나를 다시 집어 마개를 뽑아 내미려니 그것마저 품에 넣어버릴 거 같아, 엊그제 감주를 말아 먹었던 사발에 따랐다. 설거지를 하지 않은 게 걸리지만 브루스가 따질 입장은 아니니까 뭐. 입가에 대어주자 입술을 열고 홀짝홀짝 들이마신다. 쥐콩만큼 줄어든 물을 옆에 두고 딕도 브루스 곁에 가 앉았다. 이런 상황임에도 얼굴이 반갑다. 뒷편에서 고로롱인지 드르렁인지, 작게 코를 골기 시작하는 둘째 동생도 반가웠다. 멀뚱멀뚱 딕을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빙긋빙긋 웃기만 하는 브루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사실 나 방금 전까지 브루스 보고싶다, 가족들 다 보고싶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았어요?"

"응."

"오 정말? 집에 가고 싶다고 우는 소리도 했는데 그것도 다 알고 있었어요?"

"응."

"배트맨은 역시 모르는 게 없다 그쵸?"

"모르는 건 있단다. 너에 대해 아는 게 많을 뿐."


 꼬박꼬박 대답하는 것도 재밌는데 평소와 다르게 기특한 대답을 해오는 브루스에 딕은 헤벌쭉 웃었다. 역시 수다는 듣는 이가 있어야 하는 맛이 난다. 양반 다리를 하고서 브루스와 마주 앉자 눈을 깜빡깜빡하더니 아, 소리를 냈다.


"줄 거 있단다."

"나한테요?"

"응. 이미 부셔놓은 거라 오는 길에도 멀쩡했을 거다."


 이미 부셔놨다고요? 되묻기도 전에 품 안에서 뚜껑 덮인 조반기를 하나 꺼낸다. 황동 광택이 반지르르한 뚜껑을 열어보자 그릇 가득 먹기 좋게 빻은 강정들이 종류별로 드러났다. 딕이 좋아하는 말린 열매도 듬뿍 섞여있다. 갑자기 목이 따가워져서 딕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조심스럽게 받아들자 고소한 냄새가 비부 가득 밀려들어왔다. 매운 향은 하나도 없는데 코가 시큰거린다.


"와... 브루스, 생각지도 않았는데... 고마워요."

"너 좋아하는 거니까. 집에 더 있단다. 아주 많이."

"지금은 이걸로도 충분해요, 진짜 먹고 싶었어요."

"근처에 소 한 마리도 구해서 묶어놨으니까, 문제 없을 거다."


 그랬군요. 직접 젖 짜먹기 좋게 소까지 구해왔네요. 김 빠진 웃음을 내며 딕은 그릇을 소중하게 올려두었다.아닌 밤중에 홍두깨는 들어봤지만 아닌 새벽에 박쥐가 물어다 주는 간식이라니. 어쩜 이렇게 타이밍도 좋은지. 어제까지만 해도 휑하게 느껴졌던 안전 가옥은 따로 불을 넣지 않아도 훈기가 가득 차오르는 것만 같다. 딕의 옆에서 꿈질꿈질 엉덩이를 옮긴 브루스가 푹신하게 솜을 누빈 금침 위를 톡톡 두드렸다. 


"여기 누우렴 딕."

"아, 괜찮아요. 그렇게 안 피곤해요."

"아냐, 누워야 해."

"네? 왜요?"

"누워야 자장자장 해주지."


 ...네? 예? 뭐요? 잘못 들어도 한참 잘못 들은 거라고 확신하는 뇌와 내가 방금 분명히 들었는데 날 무시하는 거냐며 항의하는 귀가 서로 옥신각신했다. 둘이 싸우게 내버려두고 딕은 냉큼 가서 누워버린다. 브루스 앞에서 체면 따질 사이도 아니고, 논리적으로 지적하기엔 브루스가 직접 말하는 '자장자장'이 너무 유혹적으로 들렸다. 가슴 위에 손을 겹쳐 모으고 눈을 깜빡깜빡, 해보였다. 다분히 과장된 행동이지만 브루스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얼굴로 딕의 옷자락을 정리해준다. 나이트윙의 상징과도 같은 푸른 끈을 정성스레 펴더니 딕의 허리께에 둘둘 접어주기까지 한다. 모든 게 우습고 재밌어서 볼이 아플 지경이지만 딕은 얌전히 있었다. 누운 얼굴 위로 내려다보는 브루스의 모습은 오랜만이지만 낯설지는 않다. 딕이 장난스레 물었다.


"로빈 때처럼 자장자장 해주려고요?"

"응."

"왜요? 내가 해달라고 할 땐 들은 척도 안하더니."

"그 때 안해줬으니까, 지금은 해주고 싶구나."


 놀리려고 물은 건데 브루스가 시종일관 진지하게 대답해서 딕은 비로소 조금 어색해졌다. 싫은 건 아닌데, 어쩐지... 수줍었다. 가면을 졸라매느라 살짝 눌린 머리카락을 살며시 쓸어넘기는 손이 따끈따끈했다. 


"취한 상태로 말해서 미안하구나."

"어... 브루스, 취한 거 알고 있네요."

"응. 많이 취했단다. 십 년 만에 처음인 거 같구나."

"와... 이런 주정은 또 처음보네. 신기해라."

"너는 첫째잖니."

"새삼스럽게... 당연하잖아요."

"어리광을 맘껏 부려도 되는 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단다. 지금처럼."

"...왜... 지금인데요?"

"너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가장 빛나는 아이인데, 오래 혼자 있게 해버렸잖니."


 너는 늘 많은 사람들의 애정 속에 있어야 하는데. 어쩐지, 후회 가득한 듯 느껴지는 목소리에 딕은 대꾸 대신 제 이마를 쓰는 브루스의 소매를 힘주어 당겼다. 몸을 숙이게 만들고도 계속 당기자, 브루스가 눈을 도르륵 굴리더니 엉거주춤 옆에 눕는다. 아늑한 금침을 밀어두고 딕은 브루스의 팔을 당겨 머리 아래로 가져온다. 팔베개 덕에 훅 가까워진 체향에선 술의 쓴 향과, 흐릿한 차 내음, 그리고 반들반들 윤이 날듯 달디단 유밀과의 향이 난다. 그리고 그 너머로 느껴지는 브루스의 향... 열이 오른 이마에 대주는 얼음처럼 서늘하고, 깊은 향이... 

 가슴께에 부드러운 무게가 내려앉았다가 떨어진다. 토닥토닥. 도담도담. 일정한 박자로 제 몸을 두드리는 손길 사이사이로 나직한 노랫말이 스며들었다. 자장자장. 자장자장. 끊임없이 반복되는 건 네 글자가 고작이었지만 부드럽게 흐르는 곡조는 무척 그윽했다. 딕의 눈이 가물가물 감겼다. 하늘처럼, 바다처럼 새파란 눈동자가 잠결에 가라앉는다. 


"오늘도 수고많았다."

"...열심히 했어요..."


 정말로요. 투정하듯 중얼거리는 딕은 제가 어느순간 졸음에 발끝까지 젖어들고 있음을 느낀다. 분명 졸리지 않았는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눈이 말똥말똥했는데. 어린 시절에도 이만큼 빨리 잠에 빠져든 적은 없던 것 같다. 옆으로 누워 몸을 말자 몸 위로 부드러운 이불이 덮이는 것이 희미하게 느껴진다. 도담도담, 토닥토닥. 자장자장. 옷도 벗지 않고, 세수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정리하지 않고 드는 잠자리인데도 아무 걱정 없이 편안하다. 곁에 가족이 있는 건 정말 좋아요. 꿈처럼 속삭이자 브루스가 그렇지, 대답해주는 것도 같다. 한없이 이어질 것같은 곡조과 밝아오는 동녘 속에서 딕 그레이슨은 정말 아기처럼 깊게 잠들었다. 

 눈을 뜨면서 브루스는 제가 잠들었다 깨어난 것을 뒤늦게 인지했다. 언제 잠들었지... 돌이켜 볼 필요도 없이, 어젯밤 일을 고스란히 새긴 두뇌가 빙빙 돌아가기 시작한다. 술에 절여져도 인지 과정만은 멀쩡하다는 사실에 안심해야하는 건지, 아니면 죽을 만큼 부끄러워져 우물 속에 머리를 빠뜨리고 싶어져야 하는지 모르겠다. 아마 후자에 더 가까울 것이다. 새벽이 밝아올 때 즈음 제 둘째와 신명나게 부어라 마셔라 술판을 벌이고서 그대로 첫째의 집에 와 뻔뻔한 행태를 부린 것을 돌이켜 보며 브루스는 정말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눈만 움직여 왼편을 보니 제 옷은 발치에 벗어두고 배트맨의 겉옷을 둘둘 감고 자고 있는 제이슨이 보였다. 곤히 잠든 모습은 어젯밤 내일이 없는 것처럼 병을 기울이던 그 애가 맞나 싶을 정도로 순하다. 제이슨이 무사한 걸 확인한 브루스는 한숨을 삼키며 천천히 제 몸을 짓누르는 무게 쪽에 눈을 향했다.

 예상대로, 새근새근 고른 숨을 쉬며 제 몸을 침상 삼아 누워 있는 것은 딕이다. 딕이 아닌 게 더 아찔한 상황이겠지만 지금은 딕이라서 더 수치스럽다. 어젯밤 땅콩부터 자장자장까지 모든 게 다 기억나는 입장에선 특히 더 그랬다. 더할 나위없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잠든 첫째가 깨지 않도록 몸을 빼내보려던 브루스는 급격히 늘어나는 무게에 헛숨을 살짝 들이키고 만다. 눈을 감은 그대로 딕이 소곤거렸다. 


"어젯밤에 한 일 다 기억하죠? 그럼 가만 있어요."

"딕..."

"반박은 듣지 않아요. 나한테 어리광 부릴 날이 필요하다면서요. 오늘이 다 가려면 아직 한참 멀었어요."


 얌전히 있어요 브루스. 조곤조곤 말하는 입술을 직접 보는 게 아니라면, 저 평화롭고 안온한 표정으로 말하는 거라곤 믿기 힘들만큼 간사한 목소리였다. 정말 이러기니? 브루스가 한탄처럼 쏘아붙이자 딕은 입꼬리만 끌어올려 그림으로 그린 듯 예쁜 미소를 생긋 지어보인다. 


"당연하죠."

"..."

"내가 마저 잘 동안, 술 퍼마신 것에 대해 반성 좀 하고 있어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살짝 들어보려는 목 위로 검푸른 선이 새겨진 장갑이 올라오더니 지그시 누른다. 별 수 없이 다시 머리를 눕혀 천장을 바라본 브루스는 조금 울고 싶어진다. 내가 잘못했다. 말해보지만 딕은 눈썹 하나 까딱 않고 다시 고른 숨만 내쉴 뿐이었다. 옆에서 제이슨이 끄으응, 불편한 소리를 내는가 싶더니 머리 너머로 붉은 바지와 가죽 혁대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다. 상의에 이어 하의까지 전부 벗어던지고서야 만족스러운 콧소리를 내며 다시 잠든 둘째와, 제 몸 위로 발까지 전부 올려놓고 안락하게 조는 첫째를 두고, 아스라이 들려오는 소 울음소리를 애써 못 들은 척 굴며, 천하에 이름 높은 배트맨은 그저 한숨을 쉴 뿐, 별 도리 없이 눈을 감고 영영 오지 않을 거 같은 잠을 청해보는 것이다. 

 

- 終 -

장식2.png

©2020 by 한복합작. Proudly created with Wix.com

bottom of page